역사적 인물

승인 없이 이룬 대업: 비행정으로 실트에서 뉴욕까지

볼프강 폰 그로나우(Wolfgang von Gronau)의 비행은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온 세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30년 8월, 그는 비행정(플라잉 보트)으로는 인류 최초로 대서양 횡단에 나섰고, 그 대담한 계획은 마침내 현실이 됩니다.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뉴욕까지 비행하고자 합니다." — 1930년 8월 볼프강 폰 그로나우가 베를린 교통부에 보낸 무전 메시지입니다. 그가 이 메시지를 보냈을 때는 이미 대서양 횡단 비행의 두 번째 구간을 날고 있었습니다. 그는 1930년 8월 18일 실트(Sylt) 섬의 리스트(List)에서 당국과도, 심지어 동료들과도 사전 협의 없이 이륙했습니다. 무허가 비행의 목적지는 뉴욕. 1930년 8월 26일, 4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그의 '도르니어 발(Dornier Wal)' 비행정은 무사히 물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비행정으로 대서양을 건너는 사람은 그까지 아무도 없었기에, 그로나우와 3명의 승무원은 뉴욕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 개척적 업적은 항공사에 기록되었고, 2년 후 그가 이루어내는 세계 일주 비행의 리허설이 되었습니다.

바다에서 시작해 하늘로

볼프강 폰 그로나우는 1893년 2월 25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로이센 장군의 아들로 동프로이센에서 성장했으며, 고등학교를 마친 뒤 1911년 해군 사관생도가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군 중위·대위로 여러 군함에서 복무했지만, 그의 진짜 관심사는 하늘이었습니다. 결국 1915년부터는 다양한 전선 및 참모 직책에서 해군 조종사로 활약했습니다.

실트에서 젊은 파일럿들을 지도하다

리스트 자치체는 훗날 볼프강 폰 그로나우에게 명예 시민권을 수여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로나우는 해군 대위 계급으로 예역하고 동프로이센에서 농장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으로 날아간다는 꿈은 언제나 가슴속에 있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이 초기에 동력 비행을 금지했기 때문에 그는 한동안 활공 비행에 몰두했다가, 이후 다시 동력 항공기로 돌아왔습니다. 1926년에는 하인켈 'He 5'를 몰고 바르네뮌데에서 열린 '제1회 독일 수상기 경기'에서 우승했습니다. 얼마 뒤 같은 기종으로 세운 고도 신기록은 전후 독일이 공인받은 최초의 세계 기록이 되었습니다. 1926년 12월, 그로나우는 새롭게 설립된 바르네뮌데 독일 항공학교의 교육 책임자를 맡았고, 이후 실트 섬의 독일 항공학교 리스트로 옮겨 학교를 한층 더 발전시켰습니다.

이미 화제를 모으던 아이슬란드 비행

그로나우는 1929년 하루 만에 아이슬란드까지 비행하면서도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매우 놀라운 항공 성취였습니다. 적어도 이 무렵부터 그는 미국까지 날아간다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등록번호 D-1422를 단 '도르니어 발' 비행정이 있었습니다. 이 기체는 1925년 극지 탐험가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일행이 북극점 탐사에 사용한 두 대의 항공기 중 하나로, 당시에는 N25라는 명칭이 붙어 있었습니다.

허가 없이 뉴욕으로

교통부가 갖가지 행정적 장애물만 앞세우자, 그로나우는 과감하게 허가 없이 꿈을 이루기로 결심합니다. 1930년 8월 18일, 그는 3명의 승무원과 함께 실트 섬 리스트를 출발했습니다. "비행정 도르니어 발에 작별 인사를 나누고 탑승하자 모든 불안이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먼저 '엘보(Elbow)'라 불리는 길고 좁은 반도 위를 날았습니다. 이 반도는 반원형으로 리스트 항구를 감싸 보호해 주는 곳입니다." 실터 룬트샤우(Sylter Rundschau)가 전하는 그로나우의 회고입니다. "며칠간의 폭풍 때문에 해변에는 아직 거센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음을 커다란 목표에 집중하기 위해 고도를 더 끌어올렸습니다." 그로나우는 무려 이틀이 지난 뒤에야 승무원들에게 대담한 계획을 알렸습니다. 원래 승무원들이 부임받은 임무는 노르드카페(북곶) 왕복 비행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뉴펀들랜드를 연달아 거치며 비행기는 목적지 뉴욕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하늘이 아니라 바다로

독일로 돌아가는 길은 비행정이 아니라 하파크 로이드(Hapag-Lloyd) 증기선이 담당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승무원들의 비행 성과를 대대적으로 축하했고, 허버트 후버 대통령마저 비행사들에게 축하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로나우와 팀은 배편으로 귀국했습니다. 하파크 로이드 증기선이 그들을 고향으로 데려다주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로나우는 독단적인 결정에도 불구하고 큰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 국가교통부 장관 테오도어 폰 게라르트(Theodor von Guérard)는 그에게 클라이스트의 '홈부르크 왕자' 호화판을 하사하도록 했습니다. 클라이스트 희곡 속 왕자가 명령에 정면으로 어긋나 전투에 뛰어들었다가 — 그리고 그 전투에서 승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실트에서 세계 일주까지, 그리고 보덴호로

한편 그로나우의 머릿속에는 곧바로 실행에 옮긴 새로운 비전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1931년, 그는 새 비행기와 각종 계측 장비를 갖추고 앞날에 점점 중요해질 북방 항로를 탐사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그린란드 빙상 위를 날아 새로운 산맥을 발견했고, 아이슬란드와 래브라도를 거쳐 마침내 시카고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비행 인생의 정점은 단연 세계 일주였습니다. 1932년 7월 22일 실트에서 출발한 그는 다시 한번 '도르니어 발'을 몰고 대서양, 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일본, 상하이, 홍콩, 마닐라, 버마를 차례로 넘었습니다. 벵골만에서는 엔진 고장으로 불시착을 강요당했지만, 영국 증기선에 견인되어 랑군까지 이동한 뒤 그곳에서 세계 일주를 이어갔습니다. 1932년 11월 9일, 로마를 경유한 그로나우는 마침내 보덴호(Lake Constance)의 도르니어 공장에 도착했고, 이후 리스트로 귀환했습니다.

농업이라는 두 번째 열정

항공 경연에 꾸준히 참가했던 그로나우는 이 위대한 업적으로 수많은 포상을 받았습니다. 1933년 2월, 독일 정부는 그를 신설된 항공청에 임명해 해군 조종사 양성 업무를 맡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주일 독일 대사관에서 항공 무관으로 근무했습니다. 종전 후에는 일본에서 억류되다가 1947년에야 독일로 돌아왔고, 이후 북미 항공기 제작사의 대리인으로 활동했습니다. 1955년에는 자신의 개척 업적을 '세계비행사(Weltflieger)'라는 제목의 책에 생생하게 담아냈으며, 1958년부터는 다시 농업에 몸을 담았습니다.

두 번의 결혼 생활 끝에 첫 아내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둔 그로나우는 1977년 3월 17일, 오버바이에른의 프라스도르프에서 8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와 두 번째 아내는 그를 명예 시민으로 맞아준 리스트에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