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귀족 여성 두오다(약 800년경~843년 이후)는 아들 기욤을 위해 집필한 교육서 『아들에게 보내는 안내서(Liber Manualis)』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이 책은 당대의 삶과 정치를 엿볼 수 있는 매우 가치 있는 교훈서로 평가받는다.
신비에 싸인 삶의 궤적

두오다의 존재는 주로 『아들에게 보내는 안내서』를 통해서만 알려져 있으며, 그녀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그녀는 샤를마뉴 대관식 무렵인 800년경 카롤링거 제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수십 년간의 정복 전쟁 끝에 프랑크 왕국은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게 되었고, 814년 샤를마뉴가 사망하자 유일한 남계 후계자가 '경건왕'이라 불리는 루이 1세로 즉위했다.
귀족 출신인 두오다는 바스코니아 공작 산초 1세 울프(현재의 랑드와 피레네아틀랑티크 지역을 다스림)의 딸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824년, 그녀는 아헨에서 샤를마뉴의 먼 친척에 해당하는 귈엘름 가문의 귀족 베르나르와 결혼했다. 베르나르는 훗날 오텐 백작, 셉티마니아 공작 및 변경백, 그리고 바르셀로나 백작과 툴루즈 백작에까지 올랐다. 2년 뒤 첫째 아들 기욤이 태어났고, 이후 둘째 아들 베르나르와 딸 로젤린드까지 세 자녀를 두었다.
고독의 시기
두오다는 한동안 남편과 함께 생활했지만, 궁정의 핵심 인물이었던 베르나르는 여러 차례 반란에 휘말리며 영지를 자주 떠나 있어야 했다. 두오다는 곧 셉티마니아의 위제스(현재 프랑스 옥시타니 지역의 가르 주)로 거처를 옮겨 영지의 행정과 방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저술 속에서 그녀는 건강 문제 등으로 남편 곁을 떠나 있어야 했다고 토로한다. 사도의 말처럼 "같은 혈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방인들에게서 오는 위험…… 나는 연약한 몸으로 그것을 견뎌야 했다."
840년 경건왕 루이가 사망하자 장남 로타르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살아남은 형제들인 대머리 카를 2세와 게르만의 루트비히 2세가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 분쟁은 결국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이어져 왕국이 다시 세 갈래로 분할되었다. 817년부터 832년까지, 그리고 834년부터 838년까지 페팽 1세가 다스렸던 아키텐은 페팽의 아들인 아키텐의 페팽 2세가 아니라 대머리 카를 2세에게 돌아갔다. 베르나르는 이렇게 시작된 갈등 속에서 페팽 2세 진영에 가담했다.

베르나르와 아키텐을 받은 대머리 카를 2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이 불안정한 시기에 두오다는 빠르게 고립되었다. 15세가 된 아들 기욤은 베르나르에 의해 대머리 카를 2세의 궁정으로 보내져 복속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카를 2세와 베르나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기욤은 사실상 궁정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린 막내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었으나, 세례를 받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떼어졌다. 남편과 두 아들 모두에게서 멀어진 고립 속에서 두오다는 기욤을 위한 교육서 집필에 착수한다.
『아들에게 보내는 안내서』
두오다의 『아들에게 보내는 안내서』는 상층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거울(mirror)' 문학 장르에 속한다. 이 장르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어떻게 올바른 기독교적 행실을 지켜야 하는지, 어떻게 악덕에 맞서야 하는지 등 도덕적 문제를 다루는 교육적 저작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카롤링거 시대 유일하게 여성의 손으로 쓰인 저작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아들이 미묘한 상황 속에서 왕의 궁정에 들어간 상황에서 두오다는 경건함과 예의, 궁정에서의 처세술은 물론 신중함과 정치적 안목까지 가르친다. 그녀는 경건왕 루이의 아들들 간의 분쟁이 특히 남편과 장남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아들을 넘어 두오다는 대머리 카를 2세의 궁정 사람들에게도 은근히 호소한다. 그녀는 "기욤이 이 책을 보여주고 읽게 될 분들"에게 "이토록 숭고하고 위태로운 과업에 나선 자신의 무모함을 나무라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나아가 그녀는 반쯤 암시하듯 '올곧은 마음을 지닌 자들'이 살해당하지 않도록 왕과 그의 형제들에게 경고한다. "모든 죄악과 불의는 반드시 그 행위자에게 되돌아온다. 왕과 제후도 마찬가지이며, 나쁘고 무가치한 삶을 사는 주교와 성직자들도 마찬가지다."
73개 장으로 구성된 이 안내서를 집필하는 데 2년이 걸렸으며, 두오다는 뛰어난 교양과 탄탄한 학문적 소양을 보여준다. 그녀는 성경을 자주 인용할 뿐만 아니라 플리니우스 같은 고대 저자들도 인용했다. 동시대 지식인들의 사유와 맞닿아 있는 계율과 성찰을 담아냈으며, 특히 정의(正義)의 집행과 사법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교육을 넘어 정치적 문제에 대한 통찰까지 담아낸 것이다.
발췌문
"나 두오다는 권면하는 바로 내 아들 기욤아, 모든 종들 가운데 거룩한 덕목 속에서 참을성 있게 성장하여 언제나 '말하기를 더디 하며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야고보서 1, 17]. 만약 노하게 된다면 죄 없이 화내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온화하시지만 너를 향해 노하시고, 재앙이 네게서 멀리 있기를! 네가 분노 중에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 (안내서 IV, 8)
"그러므로 자비를 베풀어라. 법률 재판(in iudiciis legalium)을 맡게 되더라도 자비와 관용을 보여주어라. 판결 후에도 자비는 늘 마음을 열게 하기 때문이다. '자비는 심판보다 우월하다'[야고보서 2, 13]." (안내서 IV, 8)
"또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환영하라.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멈추지 않고 그분들의 필요를 채워라. 가장 약한 이들과 형제애로 함께 아파하는 것을 잊지 말라. 항상 너의 귀족다움을 낮은 마음과 겸손한 감정 아래에 감추어 두어라." (안내서 IV, 8)
"내 아들아, 네가 정의를 사랑하고 악한 자들이 악을 행하게 두지 않는다면, 시편 기자처럼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불의한 자를 미워하였사오며 주님의 율법을 사랑하였나이다'[시편 118, 113]." (안내서 IV, 8)
징벌 원정과 비극적 최후
『아들에게 보내는 안내서』는 두오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흔적이다. 그녀가 843년 이후 언제, 어떤 상황에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녀는 다음 해에 자신의 두려움이 현실이 되는 것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843년 카롤링거 제국을 세 왕국으로 분할한 베르됭 조약은 베르나르의 동맹이었던 페팽 2세를 배제했다. 844년 대머리 카를 2세는 아키텐으로 징벌 원정을 떠났고, 툴루즈 포위전에서 패배한 베르나르는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기욤은 대머리 카를 2세에 맞서 아키텐의 페팽 2세와 손잡았다. 그러나 그는 850년 바르셀로나에서 포획되어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해 처형당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가 죽는 순간에도 곁에는 어머니 두오다가 써준 『아들에게 보내는 안내서』가 함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