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헤닝 포셰라우: 한자 시민 정신의 화신이 된 함부르크의 시장

많은 함부르크 시민들에게 그는 한자 시민(Hanseate)의 화신이었습니다. 사회민주당(SPD) 소속 정치인 헤닝 포셰라우는 9년간 제1시장으로서 한자 도시 함부르크의 운명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8월 13일에 80세 생일을 맞았을 나이였습니다.

"한자 시민은 구두나 악수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 헤닝 포셰라우가 일찍이 남긴 말로, 어쩌면 스스로를 표현한 말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에게 장기 집권한 함부르크 시장은 한자 시민의 전형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배우 칼 포셰라우의 아들로 1941년 8월 13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법학 박사이자 타고난 '사교가'

포펜뷔텔의 오버알스터 김나지움을 졸업한 포셰라우는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1969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74년부터 2011년까지 시장 재임 기간을 제외하고는 한자 도시에서 공증인 겸 변호사로 활동했습니다. 이후에는 아들과 함께 사무실을 공동 운영하며 부동산, 기업, 가족 및 상속법 분야의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약사인 아내 아네로제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포셰라우의 정치 경력은 1966년 SPD에 입당하면서 시작되었으며, 4년 후에는 반즈베크 구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974년까지 활동했습니다.

"전술 없는 정치는 소금 없는 수프와 같다"

같은 해 그는 함부르크 주의회 의원이 되었고 SPD 교섭단체 지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1982년에는 당 교섭단체 의장직을 맡아 1987년까지 수행했습니다. 이듬해 포셰라우는 클라우스 폰 도나니 제1시장의 뒤를 이어 FDP와 연립정부를 구성하며 정점에 섰습니다.

포셰라우는 열정적인 전술가로 평가받았습니다. 그에게 전술 없는 정치는 "소금 없는 수프와 같다"고 그는 TV 인터뷰에서 털어놓았습니다. 1985년 5월, 상원이 함부르크 도시청소국 스캔들의 진상 규명에 소홀하다고 판단해 교섭단체 지도자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그는 '도덕적 신념을 지닌 전술가'라는 평판을 얻게 됩니다.

"도시의 미래를 위한 개척적 성과"

1988년부터 1997년까지 9년간 포셰라우는 함부르크 시청의 제1시장이었습니다.

독일 통일 역시 포셰라우 재임 기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가 함부르크에 어떤 기회이자 동시에 도전임을 빠르게 인식했습니다. "도시의 미래를 위한 개척적 성과라고 믿는 일들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는 훗날 말했습니다. 이는 주로 5만 채의 새 아파트 공급과 공항 확장, 첫 번째 엘베 강 준설, 항만 확장 등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가리켰습니다.

'하펜슈트라세 협약'으로 이룬 '법적 평화의 회복'

1991년부터 포셰라우는 절대 다수 의석으로 한자 도시를 통치했습니다. 두 번째 임기의 최대 현안은 하펜슈트라세 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불법 점거지의 철거를 추진했지만 1994년 입장을 바꿨습니다. 그는 훗날 이를 "본보기가 된 시험"이라 불렀습니다. "처음부터 목표는 철거 그 자체가 아니라 법적 평화의 회복과 비폭력적이고 좋은 이웃 관계의 회복이었다." 실제로 하펜슈트라세 주민들과의 협약을 통해 이 목표는 달성되었습니다.

헤닝 포셰라우: '하펜시티의 아버지'

확장된 도심에 대한 포셰라우의 비전은 오늘날의 하펜시티로 이어졌으며, 2019년부터 그곳의 한 광장이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1997년 5월, 임기 종료 반년 전에 포셰라우는 하펜시티 구상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함부르크의 심장이자 상징인 도심에 관해 나는 활력이 넘치는 도시 공간이라는 비전을 갖고 있다. 내항 연안을 둘러싼 도심 확장은 이 비전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열어준다." '하펜시티의 아버지'로서 포셰라우는 2011년 도시 최고 훈장인 메이어-슈톨텐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녹색당과의 연립? "나는 어떤 무리수에도 따르지 않는다"

1997년 마지막 주 기자회견에서 물러나던 정부 수반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1990년대 함부르크에서 녹색당(GAL)이 성장했지만, 포셰라우에게 그들은 여전히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녹색당과의 연립 가능성에 대해 그는 "나는 어떤 무리수에도 따르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몇 년 후에는 녹색당을 두고 "실책"과 "얽힌 실타래"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1997년 SPD는 주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36.2%라는 득표율로 전후 사민당 최악의 결과를 기록했습니다. 이전에 38%에 '통한선'을 설정했던 포셰라우는 GAL과의 연립을 거부했고, 선거 당일 저녁 더 이상 시장직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2007년에는 구원투수로 사민당 최고 후보에 거의 오를 뻔했지만, 기습적으로 출마를 철회했습니다. 그는 올라프 숄츠(SPD)를 가치 있는 후계자로 꼽았습니다. "매우 규율 있고 충성스러우며 솔직한 인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앞으로 긍정적인 소식을 많이 들을 사람이다."

가즈프롬과의 인연

2012년 포셰라우는 합작법인 사우스 스트림 트랜스포트 AG의 감사회 회장으로 선출되며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그는 게르하르트 슈뢰더에 이어 두 번째로 러시아 에너지 기업 가즈프롬에 참여한 독일 SPD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포셰라우는 러시아에서 흑해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논란의 가스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해당 사업은 2014년 무산되었습니다.

최저임금위원회의 '적임자'

2014년 포셰라우는 연방 정부가 임명한 최저임금위원회 회장직을 수행했습니다. 독일 노동조합총연맹과 독일 고용주연합 양측 모두 이 한자 시민을 해당 직무의 "적임자"로 평가했습니다. 위원회는 2015년 새로 도입된 법정 최저임금 8.50유로를 어떤 단계로 추가 인상할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탈리아 극장에서의 감동적인 작별

"이제 막이 마지막으로 내려옵니다." 헤닝 포셰라우의 동생 에거트가 2016년 9월 형의 추도사를 낭독했습니다.

그러나 2015년 4월 초 포셰라우는 건강상의 이유로 즉시 직무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UKE(함부르크 대학병원)에서 뇌 수술을 받았고, 6개월 후에야 대중 앞에 복귀했습니다. 2016년 8월 24일 밤, 그는 가족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과 8월 13일에 75세 생일을 막 축하했을 때였습니다.

가족과 동료들은 탈리아 극장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이 독보적인 한자 정치인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포셰라우 형제는 아버지가 배우로 활동하던 바로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많은 날을 보냈습니다. 헤닝 포셰라우는 올스도르프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2019년 11월부터는 하펜시티의 헤닝-포셰라우 광장이 함부르크의 오랜 시장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