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 드 푸이, 카롤리네 오테로, 클레오 드 메로데의 명성에 가려져 대중의 기억에서 잊혔던 리나 카발리에리. 그녀는 카페 콘서트 가수로 시작해 오페라의 소프라노로 성장했다. '데미몽드(상류사회의 사교계 여성)' 중 가장 완벽한 미녀로 칭송받으며 네 명의 남편과 셀 수 없는 연인을 거느렸고, 전 세계의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 영국의 뮤즈 릴리 랭트리, 20세기 뮤직홀의 여왕 세실 소렐, 브로드웨이의 스타 안나 헬드에 이어, 가난한 이탈리아 소녀에서 국제적인 디바로 우뚝 선 '야심찬 비너스' 리나 카발리에리의 이야기를 전한다.
폴리 베르제르의 제비꽃 소녀
1874년 크리스마스, 로마의 노동자 계층 동네에서 나탈리나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녀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천사의 얼굴과 강인한 성격, 자존심 강하고 결단력 있는 기질이 돋보였다. 소녀는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니노, 오레스테, 줄리아—을 돌보며 자랐다.
청소년이 되어 거리에서 제비꽃을 팔고, 공장에서 신문 접는 일을 하며 지냈다. 나탈리나는 이 단조로운 노동이 그녀의 창조적 본성을 억누르자 깊은 우울에 빠졌다. 시간을 보내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부유한 동네를 돌아다니며 카페 콘서트에 숨어들어 가수들의 표정과 레퍼토리를 관찰하고 흡수했다.
운 좋게도 한 음악 교사가 그녀의 노래를 듣고 레슨을 제안했다. 그는 14세 소녀의 결의와 평균 이상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를 통해 나보나 광장의 카페 지배인을 만났고, 유행하는 나폴리 민요를 부르자 바로 채용되었다. 리나는 훗날 첫 무대에서 "공포에 떨었다!"고 회고했다. 이 무렵 예명인 리나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경력이 시작됐다. 카페 콘서트를 전전하며 로마 거리에서 그녀의 미모가 화제가 되었고, 그란데 오르페오에서의 첫 대성공으로 로마 최고 스타 반열에 올랐다.
기회를 잡은 리나는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치열하게 노력했다. 인기는 나폴리, 밀라노를 거쳐 파리로 번졌다.
1896년 초, 예술가의 등용문인 폴리 베르제르 무대에 섰다. 단 며칠 만에 파리의 스타가 되었고, 리안 드 푸이와 카롤리네 오테로의 이름과 나란히 포스터에 올랐다—그녀는 자서전 회고록에서 이 사실을 자랑스레 기록했다. 오테로의 자살 미수 사건으로 황금 거미의 주역을 대신 맡으며 국제적 수요가 폭발했다.
런던에서 모스크바까지
1897년 5월, 런던 엠파이어 극장에서 데뷔해 대성공을 거뒀다. 6월에는 러시아로 향했다. 온 도시가 '이탈리아의 작은 별'이라 불린 그녀를 기다렸다. 리나는 기타와 만돌린으로 구성된 여성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고국 노래를 불렀다. 새 우상이 된 그녀는 크레스토프스키 극장에서 밤마다 기립박수를 받았다. 러시아 배우 로스토프체프는 "우아한 실루엣과 예쁜 얼굴이 섬세한 도자기 인형 같다"고 평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저널은 "이탈리아의 소박함과 프랑스의 세련미를 유일하게 결합한 여성"이라 극찬했다.
폴리 베르제르에서의 가을 시즌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바레 아쿠아리움에서 아름다운 오테로와 함께 공연했다. 천사 같은 순진한 미모의 화신인 리나 카발리에리는 음란한 노래를 부르면서도 마치 미안한 듯 불렀다. 6살 연상의 스페인 정열의 원형 카롤리네 오테로와 함께 폭발적인 듀오를 이뤘다.
1897년 12월 13일, 경력의 새 장이 열렸다. 프랑스인 샤를 오몽의 초청으로 모스크바 테아트르 데 바리에테 무대에 섰다. 성공은 눈부셨다. 이탈리아 발라드를 부르고 탬버린 소리에 맞춰 타란텔라를 추는 이 작은 여인 앞에서 관객은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오몽의 후원 아래 그녀가 서는 곳마다 고귀함과 시적 아름다움으로 무대를 장악했고, 극장은 매진됐다.
1898년 1월 파리 폴리 베르제르로 돌아와 새 시즌을 보내고 여름엔 모스크바에서 다시 카롤리네 오테로와 경쟁했다. "두 스타가 관객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공주는 노래할 수 없다…
1899년 11월, 리나 카발리에리는 은퇴를 선언했다. 충격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몇 달간 알렉산드르 바랴틴스키 공자와 완벽한 사랑을 키워온 그녀. 그와 결혼하며 신분인 공주에 걸맞지 않은 무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화려한 의상은 정숙한 드레스로, 번쩍이는 보석은 남편이 준 에메랄드 세트로 바꿨다. 남편과 런던으로 이주해 기품 있는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동화는 금세 악몽이 됐다. 공자의 가문이 신분과 맞지 않는 이 결혼을 강제로 파기했는지, 심지어 결혼 자체가 실제로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기록에 흔적이 없다). 회고록에서 리나는 사랑을 위해 경력을 희생하지 않겠다며 이혼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무대의 부름을 뿌리칠 수 없었다.
다시 무대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카페 콘서트 가수가 아니었다. 오페라를 목표로 삼았다. 공자와의 교제 중 오페라계를 자주 드나들며 이 세계를 접했고,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만났다. 그중 가수 마리아니 마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악 학교를 운영하며 리나를 제자로 받아들여 성악 레퍼토리를 다듬게 했다.
스승 마지는 리나를 리스본으로 데려갔다. 1900년 1월 29일 상 카를루스 극장에서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네다 역으로 데뷔했으나, 성급한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좌절하지 않고 이탈리아로 돌아가 마지와 목소리 연마에 매진했고, 단기간에 성악 기량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나폴리 오페라에서 푸치니의 라 보엠 미미 역으로 재기해 관객을 사로잡았고, 언론은 "유망하다"고 평했다. 11월에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비올레타 역을 맡았다.
"비너스의 완벽한 화신"
1900년대 들어 리나 카발리에리는 진정한 국제적 스타가 됐다. 하녀 둘, 하인 둘, 요리사, 악단 10명, 전담 헤어드레서 없이는 여행하지 않았다. 수많은 추종자로부터 선물을 받았고, 그들 중 다수는 연인이 되었다. 모든 코코트(고급 창부)처럼 코트다쥐르를 누비며 왕족들과 교류하고 왕자, 대사들과 친구가 됐다.
수입은 월 1만 프랑(데뷔 초 15프랑의 666배)에 달했고, 샹젤리제에 빌라를 사 러시아풍으로 꾸몄다.
남녀를 불문하고 찬사가 쏟아졌다. 작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그녀를 "비너스의 완벽한 화신"이라 불렀다. 이 초현실적 미모와 크고 슬픈 눈에 매료된 당대 최고 초상화가 조반니 볼디니가 여러 점의 초상화를 남겼고, 아티스트 에르테는 이렇게 적었다:
리나 카발리에리는 키가 크고 매우 날씬했으며, 길고 웅장한 백조의 목을 지녔다. 검은 머리에 크고 검은 눈, 완벽하게 정돈된 이목구비를 가졌다. 그녀는 차가운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얼굴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언제나 풍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그녀의 비범한 매력이었다…
당대 최고 쿠튀르의 살아있는 쇼케이스이자 여성미의 상징이 된 리나는 "깊은 네크라인과 모래시계 몸매"로 유명해졌다. 라이벌들과 달리 억지로 독창성을 내세우지 않았다. 자연스러움과 순진함으로 경탄을 자아냈다!
다른 여배우들이 그녀를 닮고자 "카발리에리 스타일"로 머리를 올렸다. 오페라 극장 로열석에 타조 깃털 모자를 쓰고 진주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나타나기만 하면 관객의 시선이 무대에서 그녀에게로 쏠렸다.
거리에 나서 쇼핑을 하면 구경꾼 무리가 몰려들었다. 언론은 그녀의 섬세한 건강, 온도 변화 민감성, 과식, 심지어 지루한 대화까지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다.
코코트들은 브랜드의 대사가 되었다. 리나는 1905년 트럼프 카드에서 다이아몬드 퀸으로 등장했는데, 클로버 퀸은 호주의 클라리스 캠벨, 스페이드 퀸은 스페인의 카롤리네 오테로, 하트 퀸은 프랑스의 클레오 드 메로데였다—당대 최고 미녀들과 나란히.
미용 조언도 인기였다. 1910년경 잡지 페미나에서 "아름다워지는 기술"을 연재했고, 몇 년 전 빅토르 에마뉘엘 3세 대로에 자신의 미용실을 열어 주사비, 블랙헤드, 피부 트러블을 없애는 독자적 비법을 개발했다. 직접 화장품을 출시하고 자체 향수 브랜드까지 만들었다.
광고로 엮이기도 했지만, 이 미녀들 사이엔 서로 스포트라이트를 뺏고 뺏기는 전쟁이 벌어졌다. 장 콕토는 1913년 이렇게 증언했다:
아르메농빌에서 오테로와 카발리에리가 점심 먹는 걸 봤다. 대단한 광경이었다 (…) 털실과 속눈썹으로 무장한 기사들, 아스파라거스 왕자들을 무기로 삼은 신성한 딱정벌레들, 세이블과 에르민의 사무라이들, 쾌락의 기갑부대 (…) 그들은 주인 앞에서도 굳어 있었고, 굴에서 진주만 빼낼 수 있는 듯했다.
디바
역할은 점점 늘어났고, 세계 최고 오페라 극장들에서 공연했다. 라 트라비아타 연기가 너무나 찬사를 받아 러시아와 이탈리아에서도 같은 역을 맡았다. 1904년 1월 제노바에서 조르다노의 페도라 타이틀롤을, 그달 말 트리에스테에서 마스네의 마농을 불렀다. 레퍼토리를 다지며 디바의 명성을 쌓았으나, "다이아몬드 퀸이 오페라 퀸까지 되려 한다"는 혹평도 따랐다.
일뤼스트레 몽드에서 앙드레 샬로는 성공 비결을 "찬란한 미모와 무용·가창의 이중 재능"이라 꼽았다. 확실히 리나의 목소리는 비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최대한 활용했다. 치열한 노력으로 평범한 목소리를 연주 악기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평론가 루퍼트 크리스티안센은 "그의 예술은 무언가 연약했다… 투명하고 예쁜 작은 목소리가 그의 디아파너스한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뤘다"고 평했다.
무대 장악력도 대단했다. 연기는 항상 자발적이고 매혹적이었다. 배역 연구는 철저히 하지만 "나머지는 자신의 감정에 따른다"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예측 불가능했고,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연기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에두아르도 카푸아의 마리아 마리 공연 실황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엿볼 수 있다:
[음원 재생 플레이스홀더]
공연마다 기량이 늘었다. 1901년 10월부터 1903년 10월까지 이탈리아 무대에서 레퍼토리 역할을 두 배로 늘렸다. 1904년 초 그리운 러시아로 돌아갔다가 프랑스로 와 사라 베른하르트 극장 등 최고 무대에서 공연하며 마리아니 마지에게 계속 배웠다.
자신감을 얻어 새로운 무대,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1906년 12월 첫 미국 진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회당 1,000달러 이상을 제시했다. 미국 관객 앞 첫 무대에 긴장했지만 즉각적인 성공을 확인했다. 푸치니 라 보엠 미미와 비제의 카르멘이 최고 배역이었다. 시즌 동안 28회 공연을 소화했다. 1907/1908년 겨울엔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 초연과 마농 레스코를 당대 테너 베니아미노 질리와 함께했다.
스캔들도 따랐다. 메트로폴리탄에서 카루소와 조르다노 페도라 듀엣을 부르던 중, 그를 향해 뛰어들어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했다! 이 대담함으로 "키스하는 프리마돈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는 회고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여배우가 무대에서 진짜 키스를 했다. 대성공이었다. 스캔들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성공은 더 컸다!
새 결혼, 새 도전
1909년, 미국 최대 부호 존 제이콥 애스터의 손자 화가 로버트 윈스롭 챈들러와 교제했다. 가문의 강력한 반대에도 1910년 6월 18일 파리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석 달 뒤 리나가 이혼 소송을 제기! 스캔들은 언론과 극장가를 들썩이게 했고, 표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경력을 이어가며 나비 부인, 로미오와 줄리엣, 타이스 등 새 배역을 추가했다. 마스네의 타이스는 가장 빛나는 성공작 중 하나였다.
1912년 4월, 당대 최고 프랑스 테너 뤼시앙 뮈라토레와 약혼을 발표했다. 1913년 결혼했고, 뮈라토레는 리나가 아주 어릴 적 스치듯 한 사랑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알레산드로를 입양했다.
부부는 티 없는 행복을 과시했다. 미국 순회 공연에서 감정 가득한 듀엣을 선보였고, 행복한 커플 사진을 찍게 했다. 하지만 잇따른 공연 강행군에 목소리가 극도로 지쳤다.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활동은 1921년까지 계속됐다.
뮈라토레와의 인연은 영화 데뷔로도 이어졌다. 남편이 연출한 여러 영화에 출연했는데, 카메라 앞에서 놀랍게 자연스러웠다. 1914년 마농 레스코가 대성공을 거뒀고, 이듬해 라 스포사 델라 모르테가 파테 배급으로 1916년 미국 개봉했다. 리나 이름값 덕분에 러시아에서도 상영됐다. 그라나다의 장미들(1917년 미국 개봉), 충동적인 여인(1918년 대히트) 등 1921년까지 영화 활동을 이어갔고, 이 해 무대와 공적 생활에서 동시에 은퇴했다. 평온한 삶을 원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떠났다.
이탈리아로의 귀환
46세가 된 리나는 가족, 특히 1930년대 폐렴으로 별세한 어머니를 자주 찾으며 지냈다. 1919년 뮈라토레와 이혼한 전직 디바는 피렌체 인근 피에솔레의 빌라로 은거했다.
1927년 카레이서 주세페 캄파리와 재혼했으나, 1933년 그가 카레이싱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동생 다비데 캄파리와 교제하다 1937년 헤어졌다.
예순 무렵, 마침내 흥행사 아르날도 파보니와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 말년을 그와 함께 리에티와 피에솔레의 빌라를 오가며 보냈다. 집은 항상 이탈리아와 해외 친구들에게 열려 있었고, 공연과 불꽃놀이를 곁들인 호화로운 파티를 자주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5월 6일, 피에솔레에서 공습으로 파보니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거의 온전한 시신이 잔해에서 수습돼 로마 베라노 묘지 부모 곁에 안장됐다. 무대를 떠난 지 오래라 죽음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1955년 지나 롤로브리지다 주연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의 생애를 기리며 제작됐다.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참고 문헌
- ♦ Les Cocottes – Queens of Paris 1900 (카트린 기뇽 저)
- ♦ Lina Cavalieri: The Life of Opera's Greatest Beauty (1874-1944) (폴 프라이어 & 올가 우소바 저)
- ♦ The Muses between 1850 and 1950, exceptional women (에블린 사에즈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