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는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를 대표하는 장견이자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다가 이후 최대의 정적이 된 인물입니다. 젊은 나이에 중요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며 '위대한 자'라는 뜻의 '마그누스(Magnus)' 칭호를 얻었고, 기원전 60년에는 카이사르,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을 결성해 정치적 영향력을 한층 강화했습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로마에서 실권을 쥐었지만, 카이사르가 귀환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결국 내전으로 번졌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집트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초기 경력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106년 9월 29일 로마의 유서 깊은 원로원 의원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십대 시절부터 동맹시 전쟁(Social War)에 참전했고, 일찍부터 술라(Sulla)파에 가담했습니다. 기원전 83년에는 스스로 세 개 군단을 모병해 술라를 지원하며, 마리우스파의 파피리우스 카르보를 시칠리아에서,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아프리카에서 각각 격파했습니다. 귀환 후에는 법적 절차를 생략한 채 개선식을 거행했고, 술라로부터 '위대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특별히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지녔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여러 차례 운명의 조류에 힘입어 승승장구했습니다. 기원전 77년에는 주요 공모자의 배반과 도주 덕분에 레피두스를 전투 없이 물리쳤고, 스페인에서 세르토리우스와 4년간 팽팽히 맞서던 전쟁도 상대가 페르펜나에게 암살당하면서(기원전 72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크라수스가 이미 진압한 스파르타쿠스 낭인군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면서(기원전 71년)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두 번째 개선식을 거행한 그는 군인과 평민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업고, 법정 연령에 미달한 채 기원전 70년 집정관에 선출되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성공
공화정 체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자, 폼페이우스는 민중의 구세주로 부상했습니다. 가비니우스법(기원전 67년)과 마닐리우스법(기원전 66년)을 통해 그는 전례 없는 특별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모든 육·해군에 대한 최고 사령권, 평화와 전쟁에 대한 절대적 결정권, 속주 조세 징수권이 그것이었습니다.
지중해를 유린하던 해적을 단 두 달 만에 소탕한(기원전 67년) 데 이어, 룰쿨루스의 지속적인 공방으로 이미 기세가 꺾인 포르토스 왕 미트리다테스에게 결정타를 가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그를 격파하고(기원전 66년) 아르메니아로 진입해 티그라네스를 강화로 몰아붙였으며, 폰토스·파플라고니아·비티니아를 차례로 정복하고 안티오코스 13세로부터 시리아를 빼앗았습니다(기원전 64년).
또한 페니키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해안 전역을 로마의 지배 아래 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해 아리스토불루스 왕을 폐위하고 히르카누스 2세를 옹립했습니다(기원전 63년). 미트리다테스의 죽음 소식을 접한 뒤에는 아미소스에서 그의 아들 파르나케스의 항복을 받아내고, 그에게 보스포루스 왕국을 남겨주었습니다(기원전 62년). 이로써 폼페이우스는 소아시아 대부분과 동지중해 전역을 로마의 판도에 넣었고, 금융 사업을 적극 장려하며 기사 계급(equites)의 지지도 확보했습니다.
제1차 삼두정
기원전 61년 1월, 폼페이우스는 그리스 도시들을 화려하게 순회한 뒤 이탈리아 남부 브린디시에 상륙했습니다. 당시 카틸리나 음모로부터 갓 회복된 로마 공화국은 그가 손짓 한 번이면 충분히 무너질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인기에 대한 과신 탓에 그는 병력을 해산하는 치명적인 우를 범했습니다. '온 세상(de orbe terrarum)'을 정복했다며 성대하게 치른 세 번째 개선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 원로원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크라수스, 카이사르와 함께 이른바 제1차 삼두정(기원전 60년)을 결성했고,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혼인하여 이 동맹을 공고히 했습니다. 집정관에 오른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재향군인들에 대한 요구를 관철시켜 주었으며(기원전 60년), 삼두정의 갱신(기원전 56년)은 실질적인 세계 분할로 이어져 폼페이우스는 아프리카, 스페인, 로마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갈리아 정복에 몰두한 카이사르의 부재를 틈타, 폼페이우스는 라이벌을 능가하기 위해 양면 작전을 폈습니다. 과장된 온건함으로 원로원을, 호의(豪施)로 민중을 달래는 것이었습니다. 키케로가 원로원 귀족파와의 화해를 주선했고,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는 공화정의 동료 집정관 전통을 정면으로 깨는 '단독 집정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내전과 폼페이우스의 최후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의 요절과, 카르하이 전투에서 전사한 크라수스의 죽음(기원전 53년)으로 폼페이우스는 홀로 카이사르와 맞서게 되었습니다. 늘 그렇듯 자만심에 빠진 그는 적의 역량을 얕보았고, 기원전 50년에는 갈리아 전쟁 중인 카이사르에게 군대 해산을 요구하는 원로원 의결을 통과시켰습니다. 물론 자신의 군단과 속주는 그대로 유지한 채였습니다. 이것이 로마 내전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기원전 49년 1월) 폼페이우스의 실책은 거듭되었습니다. 로마와 이탈리아를 무혈로 내주고 원로원과 함께 그리스로 후퇴했으며, 카이사르를 궁지에 몰아넣던 디라키움의 요새 진영마저 버리고 테살리아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파르살루스 전투(기원전 48년 8월 9일)에서 병력이 카이사르군의 두 배임에도 불구하고 완패했습니다.
피신길에 오른 폼페이우스는 자신 덕분에 왕위에 올랐던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망명을 기대하며 이집트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이집트 정부는 그를 상륙조차 시켜주지 않았고, 기원전 48년 9월 28일 바다 위 배 안에서 아내와 아들 섹스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를 암살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머리는 카이사르에게 헌상되었고, 카이사르는 눈물을 흘리며 살해자들을 처벌했다고 전합니다.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함께, 기원전 45년 스페인 문다 전투에서 그의 마지막 지지 세력마저 패배하면서 로마 공화파의 마지막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참고 문헌
- 에릭 테시에(Eric Teyssier),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반역자』, 페랭(Perrin), 2013.
-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로마사』 40~41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레 벨 레트르(Les Belles Lettres), 1996.
- 뤼시앵 제르파뇽(Lucien Jerphagnon), 『고대 로마사: 무기와 말』, 플뤼리엘(Pluriel),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