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생애와 4차 항해 총정리: 아메리카 '발견'의 영광과 그림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생애와 4차 항해 총정리: 아메리카  발견 의 영광과 그림자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제노바 출신의 항해가로, 1492년 훗날 '아메리카 대륙'이라 불리게 될 신대륙에 도달한 인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서쪽 항로로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그는 동시대인들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아라곤 왕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탐험에 나섰습니다. 네 차례에 걸친 항해에서 그는 카리브해를 탐색하고 대륙 연안까지 도달했지만, 자신이 아시아에 도착했다는 확신은 생애가 끝날 때까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는 원주민들의 저항, 스페인인들의 착취, 그리고 행정관으로서의 부족한 역량 탓에 발견한 섬들에 영구적인 식민지를 세우는 데 실패했고, 결국 스페인으로 강제 송환되어 한동안 불명예 속에 잊혀졌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누구인가?

공식적으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라 불리는 그는 직공 도메니코 콜롬보와 수자나 폰타나로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바르톨로메오와 자코모라는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출신과 유년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개인 기록을 항상 스페인어로 남겼기에 그가 이탈리아인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으며, 제노바로 추방된 스페인계 유대인 가문 출신일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항해와 과학에 깊은 열정을 보였습니다.

장 드 망드빌의 세계 불가사의의 책은 그의 탐험 사업에 큰 영감을 준 것으로 전해집니다. 해군에 복무할 예정이었던 그는 1476년 리스본과 영국으로 향하는 호송선단에 합류했고,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받은 뒤 포르투갈로 피신하여 동생을 만났습니다. 1479년에는 필리파 페레스트렐루 모니스(Filipa Perestrelo Moniz)와 결혼했는데, 이 혼인을 통해 마데이라 제도를 이미 탐험한 바 있던 장인이자 선장인 바르톨로메우 페레스트렐(Bartolomeu Perestrelo)의 항해 해도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생애와 4차 항해 총정리: 아메리카  발견 의 영광과 그림자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자신의 출신에 대해 평생 침묵했기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자신의 출세를 가로막을 수 있는 요소를 숨기려는 전략으로 해석합니다. 클로드 모세(Claude Mossé)의 저서 역사의 사기극(Les Impostures de l'Histoire)의 한 장은 그의 정체성이 유대인·카탈로니아 혈통이라는 주제로 수렴하는 몇 가지 단서를 제시합니다. 첫째, 그는 원정 출발을 1492년 8월 2일에서 3일로 하루 연기했는데, 저자에 따르면 숫자 2가 유대인에게 불길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스페인 통치자들이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추방하기 전날 닻을 올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또한 카탈로니아어로 작성된 그의 항해 일지에는 성경의 언급과 함께, 예루살렘 제2성전의 파괴를 연상시키는 '두 번째 집의 파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나아가 클로드 모세에 따르면 그의 실제 성씨는 그가 카탈로니아인임을 시사합니다. "스페인 왕이 선원에게 지급하고 1488년에 발행한 최초의 지폐에는 세비야 발송 기준 '콜롬(Colom)'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카탈로니아계 유대인 가문이 콜롬이라는 성씨를 썼다"고 덧붙입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 목적은 무엇이었나?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며, 당대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작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대서양을 서쪽으로 횡단해 아시아, 즉 인도에 이르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그의 제안을 거절한 뒤, 원정 자금을 지원하기로 한 이가 바로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였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바다 제독' 칭호와 자신이 발견할 영토의 부왕(副王) 지위를 약속받았고, 팔로스의 선주 마르틴 알론소 핀손(Martín Alonso Pinzón)이 대서양 원정 소함대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생애와 4차 항해 총정리: 아메리카  발견 의 영광과 그림자이렇게 해서 네 차례의 항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첫 항해에서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세 척의 배—산타마리아호, 핀타호, 니냐호—를 이끌고 카나리아 제도를 출발했습니다. 1492년 10월 12일, 그는 바하마의 과나하니 섬에 도착해 이곳을 '산살바도르'로 명명했습니다. 10월 28일에는 원정대가 쿠바에 상륙했고, 훗날 아이티가 되는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금을 발견해 작은 요새를 세우고 39명의 병력을 남겼습니다.

첫 항해의 성공 이후 그는 17척의 배와 1,500명에 달하는 더 많은 선원과 함대를 이끌고 신대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소앤틸리스 제도와 자메이카를 발견했고, 오늘날 도미니카 공화국에 해당하는 땅에 최초의 유럽 식민지인 '이사벨라'를 세웠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항해에서는 트리니다드 섬과 파나마 지협 부근을 항해하며 탐험을 이어갔습니다.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원주민들을 접하고 전혀 다른 문화를 알게 되었지만, 그 대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콜럼버스 항해의 이면: 약탈과 노예제

우리가 콜럼버스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유명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지만, 그의 항해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습니다. 탐험가는 3년에 걸쳐 약탈과 원주민의 조공 납부를 조직했습니다. 그는 식인 풍습을 구실 삼아 카리브해 주민들, 특히 사탕수수 농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스페인인들과 식민지 간에 원주민을 분배하기 위해 '레파르티미엔토(repartimiento)' 제도가 만들어졌고, 이는 훗날 '엔코미엔다(encomienda)'로 발전했습니다. 산토도밍고에서 처음 시행된 이 제도는 정복자들이 복음화를 명분으로 원주민을 고용해 부릴 수 있게 허용한 것으로, 신대륙 최초의 서품 사제이자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던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에 의해 강력히 규탄됩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생애와 4차 항해 총정리: 아메리카  발견 의 영광과 그림자이러한 제도와 착취 방식은 수많은 전염병과 높은 사망률로 이어졌습니다.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의 행적과 노예 무역 실태를 접하게 되었고, 후일 식민지 행정관이 될 프란시스코 데 보바딜라(Francisco de Bobadilla)를 히스파니올라로 파견했습니다. 보바딜라는 콜럼버스를 '부적절한 통치'와 무능의 혐의로 체포했고, 그는 총독 직위를 박탈당한 채 1500년 포승줄에 묶인 채 스페인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스페인 군주들은 결국 그를 사면했지만, 양측 모두 그가 원래 직위로 복귀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정말 아메리카의 발견자인가?

'발견'이라는 용어 자체가 당시 유럽인의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오히려 스페인 문화를 '발견'한 것은 그 땅의 주민들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스페인인들 이전에 이 대륙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원래 아시아 출신인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뷔름 빙하기인 기원전 25,000년경, 콜럼버스보다 훨씬 이전에 베링 해협을 도보로 건너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인보다 3,000년 먼저 도달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올멕 문명 유적에서는 아프리카 흑인을 상징하는 화강암 거상(巨像)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또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 대륙에 도달한 최초의 유럽인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다른 탐험가들이 아메리카 근해를 항해했습니다. 980년경 서쪽으로 항해한 노르드 탐험가 붉은 에리크(Erik the Red)와,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상륙한 그의 아들 레이프 에릭손(Leif Erikson)이 대표적입니다.

더욱이 원정의 본래 목적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는 것이었으므로, 그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인도와 '인디언'을 발견했다고 확신했으며, 새로운 대륙의 존재는 끝내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사람은 또 다른 이탈리아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였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생애와 4차 항해 총정리: 아메리카  발견 의 영광과 그림자여러 차례의 항해에 지친 콜럼버스는 통풍에 시달리며 귀국했고, 발견한 땅에 대한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인정받으려 애썼지만 허사였습니다. 가톨릭 군주들은 그의 칭호를 회복시켜 주지 않았고, 특권을 모두 빼앗긴 항해사는 1506년 5월 20일 바야돌리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식민지화를 통해 유럽인들에게 원주민 문화를 처음으로 알린 항해자였으며, 아라와크, 치브차, 카리브 같은 부족들의 다양한 관습을 세상에 소개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1492년에 시작된 것이 아닌 이 대륙의 긴 역사를 고려하면, 그를 '아메리카의 최초 발견자'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를 불성실한 반영웅, 나아라 사기꾼으로 보기도 하며, 다니엘 파브르(Daniel Fabre)의 불가능한 영웅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이러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스페인인들의 탐욕이 낳은 노예제의 확립과 학살까지 고려하면, 이 위대한 탐험가의 이미지는 영광과 그림자를 함께 비추어 재조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문헌

- Denis Crouzet,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종말의 메신저(Christophe Colomb, messager de l'apocalypse)』, Payot, 2006.

- Jules Verne,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50–1506: 전기(Christophe Colomb 1450-1506)』, 대본(Scripts), 2003.

- 『아메리카의 발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 기록(La découverte de l'Amérique)』, 디스커버리(Fleurus),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