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트비라지 2세의 즉위와 통치
서기 1163년 비그라하라자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어린 아들 아마르강가야(아파르강게야)가 아제르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5~6년간 통치한 뒤 사촌형인 프리트비라지 2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프리트비라지 2세는 씨족장 자가데바의 아들이었습니다. 프리트비라지 2세 시대인 서기 1167년으로 기록된 비문이 한시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비문에는 차우한 통치자들이 찬드라밴시(달의 혈통)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메와르 자훈푸르 파르가나의 다우드 마을에 있는 루티 라니 사원에서 서기 1168년으로 기록된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프리트비바타, 즉 프리트비라지 2세가 무력으로 샤캄바리의 왕, 곧 아마르강게야를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그라하라자 4세가 프리트비라지 2세의 아버지 자가데바로부터 빼앗았던 왕국을, 자가데바의 아들 프리트비라지 2세가 힘으로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프리트비라지 2세의 업적
이 비문에는 프리트비바타, 즉 프리트비라지 2세의 왕비 이름도 수하그데비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프리트비라지 2세는 자선 사업으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바스투팔 왕을 격파하고 튀르크족을 물리쳤으며, 한시 요새 안에 궁전을 건설했습니다.
프리트비라지 2세는 무슬림 세력이 자신의 왕국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외숙부 구힐 킬한을 한시의 관리로 임명했습니다. 그의 왕국은 아제르와 샤캄바리는 물론, 코카(자훈푸르 인근), 메날(칫토르 인근), 한시(펀자브)까지 확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기 1169년, 프리트비라지 2세는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세 명의 경쟁자
이 무렵 아르노라자 가문에는 세 명의 성년 왕자가 살아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고 아르노라자의 손자이자 선대 왕 비그라하라자 4세의 장남인 아마르강게야(아파르강갸)로, 이미 조카인 프리트비라지 2세에 의해 왕위에서 폐위된 상태였습니다.
두 번째 왕위 주장자는 나가르주나로, 왕 비그라하라자 4세의 차남이자 고 아르노라자의 손자, 그리고 폐위된 전 왕 아마르강게야의 동생이었습니다.
세 번째 주장자는 소메슈와르였습니다. 그는 고 아르노라자의 셋째 아들이자 고 비그라하라자 4세의 막내동생이었습니다. 비그라하라자 4세에게는 두 아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소메슈와르의 왕위 계승 근거는 가장 약했지만, 아제르의 대신들은 폐위된 왕 아마르강게야나 그의 동생 나가르주나 대신, 비그라하라자 4세의 유일하게 생존한 동생인 소메슈와르를 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구자라트에서 자란 소메슈와르
소메슈와라는 차울루키아 왕 시다라자 자이 싱의 딸 칸찬데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소메슈와르의 유년기는 구자라트, 즉 외할아버지 시다라자 자이싱과 숙부인 쿰마팔의 궁정에서 보냈습니다.
외가에 머무는 동안 소메슈와라는 외삼촌 차울루키아 왕 쿰마팔의 적인 콩칸 왕 말리카르주나를 전투에서 베어 죽여 명성을 얻었습니다. 콩칸 정복 당시 소메슈와르는 칼라추리 공주 카르푸르데비와 결혼했습니다. 카르푸르데비의 아버지 아찰라자는 체디 지방의 왕이었으며, 체디데시는 오늘날 잘바푸르 일대에 해당합니다.
왕비 카르푸르데비의 몸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장남은 프리트비라지, 차남은 하리라지로 이름 지어졌습니다. 또한 왕 소메슈와라에게는 프리타라는 딸도 있었습니다. 카르푸르데비의 아들 프리트비라지는 역사에서 프리트비라지 3세, 즉 라이 피토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역사는 다음 화에서 다룰 예정이니, 지금은 서기 1169년 후사 없이 사망한 프리트비라지 2세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운명처럼 찾아온 왕위
이제 고 아르노라자의 두 아들 자가데바와 비그라하라자 4세, 그리고 두 손자 아마르강게야와 프리트비라지 2세는 모두 세상을 떠났고, 아르노라자의 셋째이자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 소메슈와르만이 숙부 쿰마팔의 궁정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제르의 봉신들은 왕자 소메슈와르에게 아제르의 통치자가 되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원래 소메슈와르가 아제르의 통치자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아제르의 왕 프리트비라지 2세가 후사 없이 요절하는 불행한 사건 덕분에 소메슈와르는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강대한 왕국을 손에 넣게 된 것입니다.
소메슈와르는 왕비 카르푸르데비와 두 아들 프리트비라지, 하리라지를 데리고 아제르로 왔습니다. 함께 나가르반시, 스칸다, 바만, 소드 등의 인물들도 아제르로 따라왔습니다. 이들은 모두 구자라트의 존경받는 인사들이거나 고위 관료로, 소메슈와르의 왕국 운영을 지원하기 위해 아제르에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위대한 건설왕 소메슈와르
소메슈와르는 위엄 있는 왕이 되었습니다. 비졸리아, 레바사, 토드, 아나바크 등의 지역도 그의 왕국에 포함되었습니다. 메와르의 비졸리아라는 곳에서 소메슈와르 시대의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비졸리아 비문'입니다. 이 비문의 연대는 1170년 2월 5일이며, 여기에는 차우한 통치자들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아제르에서는 소메슈와르 시대의 우산(천개)도 발견되었습니다.
소메슈와르는 조상들처럼 도시, 사원, 궁전 건설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르노라자의 상을 만들고 자신의 조상상도 제작하여 북인도 조각 예술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왕 소메슈와르 시대의 주화들은 아제르의 번영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시바 신봉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이나교에 관용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그는 비살라데바의 궁전보다 더 높은 거대한 바이디야나트 사원을 건설했습니다. 이 사원에는 브라흐마, 비슈누, 마헤시(시바)의 신상을 모시고, 아버지 아르노라자의 승마상을 세웠습니다.
소메슈와르는 산맥과 높이를 다투는 다섯 개의 사원을 아제르에 건설했고, 이 사원들을 '다섯 개의 칼파브리크샤(소원을 이루어 주는 신수)'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아제르에서 9마일 떨어진 가우가나크 등 여러 곳에 많은 사원을 지었습니다. 비졸리아 비문에 따르면, 출생 별자리에 따른 그의 이름은 '프라탑 랑케슈와르'였다고 합니다. 그는 강대한 왕으로서 모든 적을 정복했습니다. 다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차울루키아-차우한 갈등이 다시 일어나 그가 고생을 겪기도 했습니다.
다음 화 예고 – 라니 카르푸르데비, 차우한 왕국을 섭정하다!
- 닥터 모한랄 굽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