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대제'라 불린 오스트리아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40년 통치의 삶과 업적

'대제(大帝)'라는 별명으로 불린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대공비이자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의 여왕입니다. 40년간 제국을 통치한 그녀는 당대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내성적인 어린 시절

황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황제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 발부르가 아멜리에 크리스티나 폰 합스부르크는 1717년 5월 13일 빈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의 첫 아이가 요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죠. 이 부부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성인까지 살아남은 이는 단 두 명뿐이었는데,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다음 해에 태어난 여동생 마리아 안나였습니다.

진지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귀족 소녀들에게 주어지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말타기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노래와 활 쏘기를 즐겼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라틴어를 배웠으며, 드로잉, 회화, 음악, 무용도 익혔습니다. 14세부터는 평의회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아들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던 아버지는 국정 운영에 대해 그녀를 따로 준비시키지 않았습니다.

 대제 라 불린 오스트리아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40년 통치의 삶과 업적

프랑수아 에티엔 드 로렌과의 결혼

젊은 시절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한 수많은 혼담이 오갔습니다. 처음에는 로렌 공국의 후계자 레오폴 클레망과 약혼했지만, 그가 12세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와의 혼약도 논의되었으나, 결국 레오폴 클레망의 동생이자 로렌 공작인 프랑수아 에티엔과 약혼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에 빠졌습니다. 1736년 2월, 19세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수아 에티엔 드 로렌과 결혼했습니다. 이 부부는 열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중 열 명이 성인으로 자랐습니다.

173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종식시킨 빈 조약에서 비밀리에 합의된 바에 따라 프랑수아는 로렌과 바르 공작령을 포기하는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을 받게 됩니다. 토스카나의 대공과 대공비가 된 두 부부는 이듬해 피렌체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10월 카를 6세가 서거하면서 정당한 상속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극도로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동맹국들은 그녀를 지원하기를 거부했고, 오스트리아는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이 바닥나 있었으며, 군대는 지쳐 있었습니다. 여기에 아버지에게 국정을 배우지 못했고, 세 아기를 낳았지만 모두 딸이라는 점 때문에 그녀의 정통성마저 의문받았습니다. 게다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될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폭발적인 상황은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프랑스 등이 얽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번졌습니다. 1742년에는 카를 6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숙인 바이에른의 카를 알브레히트가 카를 7세로서 황제에 선출되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먼저 자신을 군주로 인정받으며 오스트리아 내 권력을 다졌습니다. 여성이 다스릴 수 없다고 여기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헝가리의 '왕' 칭호를 사용했죠. 또한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국가들에 맞서 잉글랜드와 헝가리 귀족들과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습니다. 남편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될 수 있도록 그녀는 프랑수아를 오스트리아령과 보헤미아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지만, 국정에 대한 실권은 끝까지 자신이 쥐고 있었습니다.

 대제 라 불린 오스트리아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40년 통치의 삶과 업적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전쟁 초기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광산 지역 실레시아를 차지하려던 프로이센에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전쟁 지휘와 잦은 임신을 동시에 감당했으며, 훗날 "임신하지 않았다면 직접 전선에 나갔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지원을 얻는 대가로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745년 카를 7세가 사망하자 프랑수아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어 프란츠 1세가 되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로마인들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왕위 계승 전쟁은 1748년에 종결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실레시아를 프로이센에 할양했지만, 다른 합스부르크 영토는 모두 지켜냈고 황후의 왕좌 역시 확고히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대제'

 대제 라 불린 오스트리아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40년 통치의 삶과 업적

프랑수아는 황제였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황후였지만, 강한 의지와 투지, 용기를 지닌 그녀는 스스로 국정의 중심에 섰습니다. 곧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황후'라고 불렀고, '마리아 테레지아 대제'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실권을 쥔 이는 다름 아닌 그녀였습니다.

그녀의 막내아들이 태어난 해는 1756년이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미 연장자들의 결혼 협상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헌신적이지만 엄격한 어머니였던 그녀는 외교를 최우선으로 여겼고, 자녀들의 결혼은 모두 동맹을 구축하는 기회로 활용되었습니다. 아들 요제프는 파르마의 부르봉 공주 마리아 이사벨라와,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작센 공작과, 그리고 딸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는 1770년 프랑스의 도팽, 즉 훗날의 루이 16세와 결혼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매주 자녀들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그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꺼이 질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개혁

1765년 프랑수아가 세상을 떠나자 남편을 깊이 사랑하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녀는 왕위에서 물러날 생각까지 했지만, 아들 요제프가 너무 오만하고 가혹하다고 느껴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로 선택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제국을 현대화하고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개혁을 단행했으며, 성직자와 귀족에게 과세하여 국고를 충당하고자 했습니다. 이 조치는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지만 제국 경제를 크게 개선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적극적인 공중 보건 정책을 시행해 영유아 사망률 감소에 힘썼고, 그라츠 병원 사망자의 부검을 의무화하며 새 묘지 조성을 통제했습니다. 아울러 마녀 화형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개혁에도 힘쓴 그녀는 6세부터 12세 아이들에게 의무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 조치는 많은 마을에서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저항을 없애려 애썼지만 부분적인 성공만 거두었습니다.

재위의 끝

1767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천연두 유행병에 걸렸습니다. 이 전염병으로 며느 한 명과 딸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녀 자신은 살아남았지만 기침, 피로, 호흡곤란 같은 건강 문제를 평생 안고 가야 했습니다.

1780년 11월 그녀는 감기에 걸렸고, 며칠 후인 11월 28일 곁에 남아 있던 자녀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눈을 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