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산주의 운동가 레이몽드 디엔(Raymonde Dien, 1929년생)은 1950년 인도차이나 전쟁에 평화적으로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 행동으로 인해 수감되었습니다.
인도차이나 전쟁

레이몽드 디엔은 본명 레이몽드 위베르도(Raymonde Huberdeau)로, 1929년 5월 13일 프랑스 사르트(Sarthe) 지방의 망시네(Mansigné)에서 태어났습니다. 공산주의 활동가였던 그녀는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겨우 17세였습니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둘러싼 분쟁으로, 프랑스는 공산주의를 내세운 베트남 독립운동 조직 비엣민(Việt Minh)과 대립했습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이 탈식민지 전쟁은 국제적 냉전 구도 속에 편입되면서 더욱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PCF)은 특히 1949년 말부터 인도차이나 전쟁에 결연히 반대했습니다. 1949년 11월부터 1950년 5월까지 마르세유를 시작으로 프랑스 각 항구에서 군수 물자 선적을 막는 부두 노동자 파업 등 대규모 행동이 전개되었고, 당 기관지 뤼마니테(L'Humanité)는 거의 매일 반전 기사를 실었습니다.
1950년 2월 23일
1950년 2월, 프랑스 공산당은 인도차이나로 향하는 군수 물자 열차가 앵드르에루아르(Indre-et-Loire) 주의 생피에르데코르(Saint-Pierre-des-Corps) 역을 지나게 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2월 23일, 수백 명의 평화 시위대가 역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열차의 통행을 막기 위해 레이몽드 디엔과 당 연방 서기를 지낸 또 다른 활동가 르네 자넬(René Jannelle)은 선로 위에 몸을 눕혔습니다. 당시 레이몽드의 나이는 스물이었습니다.
시위가 끝난 후, 철도 호송대에 탑승해 있던 군인들이 '바지를 입은 여성 한 명'이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습니다. 경찰이 프랑스 공산당 사무실을 찾았을 때 레이몽드 혼자만이 그곳에 있었고, 그녀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목격자들의 진술로 신원이 확인된 그녀는 '국방에 사용될 수 있는 물품 훼손 방조' 혐의로 기소되어 투르(Tours)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녀는 시위 참가자 중 유일하게 기소된 사람이었습니다.
그해 3월 18일, 뤼마니테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그녀는 스물 살이다. 부드러운 긴 얼굴, 맑은 미소. 2월 23일 수요일, 투르 감옥의 문이 그녀의 뒤로 닫혔다. 레이몽드 디엔은 무슨 죄로 일반 형사범들 사이에 던져진 것인가? 그녀는 베트남으로 보내질 전차들을 싣고 검문 후 출발 예정이던 열차 앞 선로에 몸을 눕혔다. 장소는 생피에르데코르 역이었고, 수백 명의 평화 지지자들이 그곳에 함께 있었다…"

저항의 상징
재판은 그해 6월에 열렸습니다. 변호사 마리루이즈 자키에카생(Marie-Louise Jacquier-Cachin)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레이몽드 디엔은 징역 1년과 15년간의 시민권 박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인도차이나 전쟁 저항의 상징이 된 레이몽드는 프랑스 공산당이 벌인 광범위한 지원 캠페인의 혜택을 입었으며, 국경을 넘어서까지 지지를 받았습니다. 곳곳에서 시위가 조직되었고, 수천 명의 활동가들이 투르와 오를레앙의 검찰에 그녀의 석방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으며, 뤼마니테는 그녀를 옹호하는 기사들을 잇달아 게재했습니다.
레이몽드는 결국 형기 만료보다 앞선 1950년 성탄절 무렵 석방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른 석방이 대중의 목소리와 움직임 덕분이라고 여겼습니다. 이후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은 그녀는 1953년부터 1958년까지 프랑스 공산당 산하 여성 청년 운동 단체인 '프랑스 젊은 여성 연합(Union des jeunes filles de France)'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을 기리기 위해 레이몽드 디엔은 2004년 베트남 우호 메달을 받았으며, 선로에 몸을 눕힌 그녀의 모습을 담은 동상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승리공원에도 세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