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26. 라자 자이찬드 가하드왈은 반역자가 아니었다!

26. 라자 자이찬드 가하드왈은 반역자가 아니었다!

반역자로 낙인찍힌 자이찬드, 그 믿음의 출처

서기 1192년, 라자 자이찬드 가하드왈(Raja Jaichand Gahadwal)이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왕과의 오랜 원수 관계를 설욕하기 위해 가즈니의 군주 무함마드 고리에게 인도 침공을 부추겼다는 믿음이 인도 대중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주된 근거는 미나후딘 시라지(Minhajuddin Siraj)가 저술한 『타바카트에 나시리(Tabaqat-e-Nasiri)』라는 책입니다. 미나후딘 시라지는 델리의 카디(판관)였으며, 서기 1246년부터 1266년까지 델리 술탄으로 재위한 나시루딘 마흐무드와 동시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카나우지의 라자 자이찬드와 잠무의 비자이팔이 고리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타바카트에 나시리』의 이러한 진술은 『프리트비라지 라소』 등 다른 어떤 문헌에서도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당대의 어떤 역사 문헌에서도 타라인 제2차 전투에서 라자 자이찬드 가하드왈이 맡은 역할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아제르의 역사학자 하르빌라스 샤르다(Harbilas Sharda)가 『타바카트에 나시리』의 진술을 인용하면서 이 논란은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산요기타 이야기의 과장

바트(Bhat) 계열의 음유시인들은 자이찬드 가하드왈의 딸 산요기타가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왕에게 약탈당했다는 이야기를 지나치게 과장했고, 그 결과 프리트비라지와 자이찬드가 타고난 원수 관계였다는 것이 마치 정설인 양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힌두 왕들 사이에서는 공주와의 연애, 그리고 왕이나 왕자에 의한 공주 약탈 사례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 양측 간에 즉각적인 전쟁이 벌어졌지만, 공주가 약탈한 왕이나 왕자와 결혼하면 원한은 종식되곤 했습니다. 일부 바트들의 문헌에는 산요기타 약탈 후 자이찬드의 군대가 다섯째 날 프리트비라지를 추격하여 그의 주요 봉신들을 살해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이찬드가 산요기타가 프리트비라지의 말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추격을 중단하고 군대를 이끌고 카나우지로 돌아갔다고 전해집니다.

프리트비라지가 산요기타와 함께 델리에 도착하자 자이찬드는 자신의 사제(프로히트)를 델리로 보냈고, 그곳에서 프리트비라지와 산요기타는 법도에 따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로써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청산되었고, 자이찬드는 프리트비라지에 대해 중립 입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타라인 전투에서의 중립

자이찬드는 무함마드 고리와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이 벌인 타라인 전투에서도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프리트비라지 왕은 이 전쟁에서도, 그 이전의 어떤 전투에서도 장인인 자이찬드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자이찬드와 고리 사이에 우호 관계가 있었다면, 고리가 훗날 어째서 자이찬드를 공격했겠습니까? 따라서 이 혐의는 거짓입니다.

『프리트비라지 라소』 어디에도 자이찬드가 고리에게 프리트비라지 공격을 권유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당대 페르시아 문헌에서도 자이찬드가 고리를 초청했다는 단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왕에게 변함없는 충성심을 지닌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자이찬드가 나라를 배신하고 무함마드 고리에게 인도 침공을 권했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R. C. 마줌다르 박사는 저서 『고대 인도(Ancient India)』에서 “마하라자 자이찬드가 무함마드 고리에게 프리트비라지 공격을 권했다는 주장에는 진실이 없다”고 기록했습니다.

J. C. 포벌(J. C. Poval)은 저서 『인도의 역사(History of India)』에서 “마하라자 자이찬드가 무함마드 고리에게 프리트비라지 공격을 권했다는 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밝혔습니다.

람샹카르 트리파티 박사는 자이찬드에 대한 이 혐의는 거짓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당대 무슬림 역사가들은 자이찬드가 그러한 초청을 보냈다는 사실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마헨드라 나트 미슈라는 “자이찬드가 무슬림들을 불러들여 프리트비라지를 넘어뜨렸다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며, “그 시대의 몇몇 문헌이 남아 있지만 어느 곳에도 이러한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프리트비라지 비자이』, 『하미르 서사시』, 『람바 만자리』, 『프라반다 코시』 그리고 어떤 무슬림 여행가의 기록에도 그런 언급은 없다”고 적었습니다. 역사는 자이찬드가 찬다와르(Chandawar)에서 무함마드 고리와 끝까지 용맹하게 싸웠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이븐 나시르(Ibn Nasir)라는 작가는 저서 『카밀울 타와리크(Kamil-ul-Tawarikh)』에서 자이찬드가 샤하부딘에게 프리트비라지 공격을 권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샤하부딘은 북인도에서 강대한 세력인 자이찬드를 격파하기 전까지는 델리와 아제르 같은 영토에 대한 지배권이 영구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이찬드의 조상들과 자이찬드 본인이 여러 차례 투르크족과 맞서 싸워 그들을 격파해 왔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 스미스(Smith)는 저서 『인도 초기사(Early History of India)』에서 자이찬드에 대한 이러한 혐의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라즈발리 판데이 박사는 저서 『고대 인도』에서 “고리가 자이찬드에 의해 프리트비라지에 대항하도록 초청되었다는 믿음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 저술가들이 어디에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결론: 역사의 큰 오류

결론적으로, 오직 『타바카트에 나시리』라는 한 문헌에만 근거하여 자이찬드에게 반역죄를 씌우는 것은 역사 서술의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나후딘 시라지는 델리 노예 왕조 술탄들에 의해 임명된 도시 카디였으며, 술탄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러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말은 다른 어떤 사료로도 뒷받침되지 않으므로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다음 화 예고 — 무함마드 고리, 조약을 구실로 프리트비라지 왕을 배신하다!

- 모한랄 굽타(Mohanlal Gupta)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