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이자 레지스탕스 저항 운동가였던 제인 비알레(Jane Vialle, 1906~1953)는 프랑스 최초의 흑인 상원의원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정치 활동 내내 인종차별과 갖은 차별에 맞서 싸우며 아프리카의 평등과 발전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유년기
제인 비알레는 빌리족 콩고 출신 어머니 테레즈 칠룸부(Thérèse Tchiloumbou)와 프랑스인 아버지 미셸 비알레(Michel Vialle) 사이에서 1906년 8월 27일, 오늘날 콩고 공화국 북부의 우에소(Ouesso)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날 당시 프랑스 탐험가와 정착민들은 이미 수십 년간 콩고 지역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령 콩고 식민지는 1882년에 설립되었고, 1910년에는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에 통합되었습니다. 1899년부터 콩고는 양허 회사들에 넘겨졌으며, 이들 다수는 고무를 착취적으로 채취했습니다.
1899년 무역회사인 콩고 상부 회사(Compagnie française du Haut Congo)가 제인의 출생지를 포함한 약 36,000㎢의 영토 양허권을 획득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근무했습니다. 딸이 태어난 다음 해 그는 고무와 상아 무역을 하던 상부우방기 술탄국 회사(Société des Sultanats du Haut-Oubangui)에 고용되어 현재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남동부의 방가수(Bangassou)로 이주했으며, 제인도 함께 데려갔습니다.
이후 제인은 아버지를 따라 곳곳을 옮겨 다녔습니다. 1912년 파리에 머무는 동안 미셸은 제인을 정식으로 자신의 합법적 딸로 인정받았습니다. 2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제인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고, 여덟 살이었던 제인은 이곳에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쥘 페리 고등학교(Jules-Ferry)에서 공부하여 1925년 바칼로레아를 취득했는데, 당시 성차별과 인종차별이라는 이중의 벽에 부딪히던 젊은 흑인 여성에게 이는 결코 당연한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저항 운동가
1927년 제인 비알레는 마르셀 보부아(Marcel Beauvois)와 결혼했으나 1940년 이혼한 뒤 다시는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바칼로레아 취득과 결혼 이후 그녀는 통신사 오페라 문디(Opéra Mundi)에서 비서 겸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40년부터는 마르세유의 신문 '콩피당스(Confidences)'에서 일했고, 아프리카 신문들에 단편 소설과 이야기를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마르세유에서 제인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드나들며 저항 운동에 뛰어든 열정적인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특히 저항 조직 '콩바(Combat)'의 정보 네트워크 책임자 장 게멜링(Jean Gemähling)과 가까워져 그의 비서가 되었고, 이윽고 스스로 저항 운동에 몸을 던져 스파이로서 유럽 전역의 나치 군대 동향에 관한 정보 수집 임무를 맡았습니다.
1943년 1월 제인은 체포되어 바우메트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같은 해 12월 "국방에 해로운 행위"라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끝내 석방되었습니다. 출옥 후 그녀는 콩바 네트워크와 다시 연결되어 장 게멜링의 비서로 복귀했으며, 전후에는 이러한 공로로 저항 메달을 수훈했습니다.
기자이자 상원의원
전후 제인 비알레는 프랑스 통신사(AFP) 기자가 되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신문들의 통신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1948년 직접 설립한 '프랑스연합 해외·본토 여성 협회'의 기관지에도 기고하며, 특히 저항 운동에서 여성의 역할과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아프리카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열망은 그녀를 정치로 이끌었습니다. 1946년 오방기샤리(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정당 '흑인 아프리카 진보 협회'를 창설했고, 1947년에는 무소속 후보로 상원의원에 당선된 뒤 사회주의 교섭단체에 합류했습니다. 상원에서 그녀는 또 한 명의 흑인 저항 운동가 출신 상원의원 외제니 에부에텔(Eugénie Éboué-Tell)을 만나, 평등 실현과 반인종차별을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가 되었습니다. 1947년부터 두 사람은 해외 영토 출신 의원들과 함께 "본토 공화국 자문위원과 해외 영토 자문위원 간"의 처우 불평등을 규탄하는 동의안을 발의했습니다.
같은 해 제인 비알레와 외제니 에부에텔은 백인 아버지에게 버려지는 경우가 많은 혼혈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친자 확인 제도가 프랑스 본토뿐 아니라 해외 영토에도 적용되도록 하는 결의안 작업에 함께 나섰습니다. 제인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저 자신이 바로 그런 양심 있는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들이 오랜 책임을 짊어지기 싫어하면 아이들을 버려두곤 합니다…" 이들의 법안은 1951년 마침내 채택되었습니다.
정치 경력
제인 비알레는 1948년 11월 총 16표 중 11표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해외 프랑스 위원회 위원을 거쳐 부의장이 되었고, 이후 노동·사회보장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1950년에는 개발의 핵심 동력이라 여긴 국민교육 위원회에 합류하여 학교 교육과정의 조화와 직업교육 개선을 위해 힘썼습니다.
1949년 제인은 프랑스령 식민지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여성의 지위에 대한 깊은 지식을 인정받아 유엔 노예제 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그녀는 강연을 진행하고 아프리카 영토의 노예제에 관한 각서를 작성했지만, 더디게 진전되는 현실 앞에서 좌절감을 느꼈고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합니다.
1952년 제인은 선거에서 경쟁자 엑토르 리비에레즈(Hector Riviérez)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1953년 2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중상을 입고 46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권리
"며칠 전 아르 에 메티에 강당에서 '아베 그레구아의 친구들'은 많은 청중을 초청해 아베 그레구아 탄생 200주년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모든 색깔의 인간들의 친구', 투사이자 모든 종교와 인종의 인간들의 수호자였던 그를 기리는 자리였습니다."
(…)
"오늘 우리는 세계인권선언을 공식적으로 기념합니다. 그 제2장 제1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인종, 성별,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 지위 등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없이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이토록 위대한 본보기 앞에서 — 하나는 남녀와 인종의 평등을 위해 평생 싸운 프랑스인이 남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에 모여 이 장엄한 인권선언을 만든 모든 나라들의 공동의 성과입니다 — 억압받는 모든 이의 피난처였고 해방과 평등의 사상 앞장에 서 왔던 프랑스가 여전히 일부 영토에서 자유로운 사람 누구나 분노할 만한 일들을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그레구아에서 세계인권선언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 희생 덕분에 오늘 우리 모두는 종교나 피부색 때문에 편견을 겪지 않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권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고귀한 원칙의 기수였던 프랑스가, 오늘날 일부 자신의 공복들로 인해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유롭게 살 권리 — 제인 비알레, 1953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