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차례의 원탁회의와 1935년 인도 통치법
영국 정부는 세 차례의 원탁회의(Round Table Conference)를 개최한 뒤 1935년 인도 통치법(Government of India Act 1935)을 제정하였고, 중앙 정부와 영령 인도 각 주에 입법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습니다. 인도 국민회의 역시 입법 의회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하고, 발라브바이(사르다르 파텔)를 위원장으로 하는 의회 소위원회를 꾸렸습니다. 라젠드라 프라사드 박사와 마울라나 아불 칼람 아자드가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공천 기준의 확립과 '히틀러' 논란
사르다르 파텔은 다가오는 선거의 후보자 명단을 결정하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그는 일정한 기준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후보자를 선발했습니다. 자신이 파텔과 가깝다고 믿었던 많은 인사들이 공천에서 배제되었고, 이들은 파텔에게 분노했습니다. 일부 국민회의 당원들이 그를 '히틀러'라고 비난하자, 파텔은 "규정된 기준에 따라 적임자에게만 공천을 부여했을 뿐"이라고 답할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르다르 파텔은 정당이 로크 사바(하원), 라지야 사바(상원), 입법 의회의 공천을 부여할 때 따라야 할 인도의 기본 원칙을 처음으로 체계화했습니다. 이는 이후 인도 정당 정치의 공천 문화에 큰 영향을 남긴 바 있습니다.
1937년 선거, 국민회의의 압승
국민회의는 중앙 입법 의회에서 명백한 과반수를 차지했습니다. 1937년 2월에 실시된 주 의회 선거에서는 마드라스, 봄베이, 비하르, 오리사, 연합주, 중앙주 등 6개 주에서 완전한 과반수를 확보했으며, 벵골, 아삼, 노스웨스트 변경주 등 3개 주에서는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반면 펀자브와 신드 두 주에서는 극소수 의석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정부 수립을 둘러싼 내부 논쟁
파텔은 국민회의가 과반수를 차지한 주에서는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당은 그 책임을 주저 없이 짊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단 모한 말비야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이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총독이 각 주의 주지사가 장관들의 업무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보장할 때에만 정부를 수립하고, 그렇지 않으면 야당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총독 린리스고 경(Lord Linlithgow)은 이러한 보장을 거부했고, 간디조차 결정을 내리지 못한 끝에 국민회의는 정부 수립을 거부했습니다.
소수정부의 실패와 국민회의의 집권
그 결과 다른 정당들에 주 정부 수립이 요청되었고, 모든 주에서 소수정부가 들어서면서 제대로 된 행정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1937년 6월 21일 총독이 협조를 보장하자, 같은 해 7월 7일 국민회의는 과반수를 확보한 주들에서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이듬해에는 국민회의가 다른 정당들의 도움을 받아 아삼과 노스웨스트 변경주에서도 자체 장관부를 출범시켰습니다. 한편 국민회의는 어느 주에서도 무슬림 연맹과 연정을 구성하지 않았으며, 벵골·펀자브·신드에서는 비국민회의 계열 장관부가 들어섰습니다. 이렇게 구성된 주 내각들은 1939년까지 대체로 순조롭게 운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