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르네상스 프랑스 유일의 여성 건축가, 자케트 드 몽브롱의 삶과 업적

인문주의자이자 학자였던 자케트 드 몽브롱(Jacquette de Montbron, 1542~1598)은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에서 알려진 유일한 여성 건축가입니다.

르네상스 프랑스 유일의 여성 건축가, 자케트 드 몽브롱의 삶과 업적

결혼에서 과부가 되기까지

자케트 드 몽브롱은 1542년, 현재 샤랑트주 중심부에 해당하는 옛 프랑스 지방 앙구무아(Angoumois)에서 태어났습니다. 1558년 6월, 16세의 자케트는 자신보다 두 배 이상 연상인 앙드레 드 부르디유(André de Bourdeille)와 결혼했습니다. 그는 부르디유 자작이자 국왕 앙리 3세의 부관, 페리고르 총독 겸 대법관이었습니다. 그의 동생은 작가이자 연대기 작가, 군인인 피에르 드 부르디유, 일명 브랑톰(Brantôme)입니다. 바로 그의 저술과 그가 형수를 위해 쓴 장례 추도문 덕분에 우리는 자케트가 예술을 사랑하고 시를 짓던 교양 있고 지적인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말을 아주 잘했고 매우 웅변적이었다 […]. 그녀와의 대화는 훌륭했고 언제나 아름다운 화제와 말로 가득했다. 그녀는 아주 아름다운 시와 산문으로 된 글들을 썼는데, 그것들은 서재의 책들 사이에 보관되어 있다. 그녀는 독서를 무척 좋아해 밤낮으로 책에 몰두하곤 했다.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를 잘 구사하고 이해했으며, 라틴어도 어느 정도 알았다."

같은 해 그라블린 전투에서 전사한 큰오라비 르네 드 몽브롱(René de Montbron)의 단독 상속인이었던 자케트는 결혼 지참금으로 앙구무아에 있는 마타(Matha), 아르시아크(Archiac), 세르통빌(Sertonville)의 재산을 남편에게 가져왔습니다. 부부는 잔느, 르네, 이자보, 아드리엔, 앙리, 클로드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1582년, 63세의 앙드레는 여러 해 전 낙마한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의 죽음에 깊이 슬퍼한 자케트는 "매우 화려하게" 장례식을 치르라고 명했습니다. 과부가 된 그녀는 부부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고, 이후 시동생을 포함한 모든 구혼자들을 거절했습니다.

부르디유 르네상스 궁전의 설계자

1587년, 자케트 드 몽브롱은 예술을 사랑하는 위대한 후원자였던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의 시녀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태후의 총애를 받는 인물 중 하나였으나, 1588년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그녀는 왕태후로부터 4,000 크라운의 유증을 받았고, 이 돈으로 상속받은 남편 가문의 소유물인 부르디유의 오래된 중세 요새 근처에 르네상스 성을 짓는 데 사용했습니다. 자케트가 이 건축에서 맡은 역할은 시동생 피에르가 쓴 장례 추도문을 통해 전해집니다.

"모든 예술 가운데 그녀는 기하학과 건축학을 무척 좋아했으며, 이 분야에서 매우 능숙하고 재능이 있었다. 부르디유에 지은 저 웅장한 건물과 아름다운 저택에서 그녀는 이를 분명히 보여주었는데, 그 집은 그녀의 발명이자 오직 그녀만의 방식으로 지어져 무척 감탄스럽다. (...) 그녀는 늘 모든 저택에서 돌을 쌓고 옮기는 일에 직접 참여했으며, 언제나 훌륭한 일에 부지런했고 그 작업에 매우 근면했다."

르네상스 프랑스 유일의 여성 건축가, 자케트 드 몽브롱의 삶과 업적

자케트는 궁전과 자신의 다른 소유지들의 설계 도면을 직접 그리고 공사를 감독했습니다. 그러나 재정 문제 때문에 이 궁전은 생전에 한 개의 익(翼)만 지어졌고, 후손들이 그녀의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후원자로서 자케트는 이탈리아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앙구무아의 마타 성도 건설했으며, 이를 통해 문화 보급에 기여했습니다. 건축가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Sebastiano Serlio)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저택에 대담한 혁신과 새로운 장식 요소를 도입할 줄 알았습니다. 이러한 예술적 선택은 이후 페리고르 지역의 다른 건축물들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케트 드 몽브롱은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에서 건축 분야에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여성입니다. 하지만 유럽 전체로 보면 그녀만 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이탈리아와 플란더스에는 더 많은 여성들이 활동했습니다. 파르마 공작 오타비오 파르네제(Ottavio Farnese)의 아내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파르마의 마르게리타, 1522~1586)는 피아첸차의 파르네제 궁전 설계 도면을 직접 그리기도 했습니다.

예술 애호가이자 인문주의자

궁정의 학자들과 어울린 후, 자케트 드 몽브롱은 자신의 영지에 자신만의 살롱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특히 시동생 브랑톰,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드 샹파냑(Jean de Champagnac) 등을 곁에 두었고, 왕실 궁정에서 자주 교류하던 인물들과 활발한 서신 왕래를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읽고, 쓰며, 예술과 문화를 지원하고 널리 알렸습니다.

제8차 종교전쟁(1585~1598) 동안 자케트는 보호를 요청하러 온 가톨릭 명문 귀족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인 콩데 공 앙리 1세 드 부르봉콩데(Henri I de Bourbon-Condé)에게 마타에서 포위당했을 때조차, 그녀는 손님들을 넘겨주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두려워하지 않으며, "믿음 아래 피신하여 구원을 구하러 온 저 가련한 사람들"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포위도 위협도 그녀의 용기를 꺾지 못했습니다.

자케트는 1597년 이전에 세상을 떠난 딸 르네를 잃었고, 이 상실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시동생에 따르면, "그 착한 아이를 잃고 그녀가 품은 우울함이 18개월 안에 그녀를 저세상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실제로 자케트 드 몽브롱은 오랜 병을 앓다가 1598년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