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초대 황제 장자크 데살린(Jean-Jacques Dessalines)의 아내였던 마리 끌레르 보뇌르(Marie-Claire Bonheur, 1758~1858)는 19세기 초 아이티의 황후로서, 전쟁과 학살의 격동기 속에서 자비와 연민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인물입니다.

마리 끌레르의 어린 시절
마리 생트 로블로(Marie-Sainte Lobelot)와 기욤 보뇌르(Guillaume Bonheur)의 딸로 태어난 마리 끌레르 헤뢰즈 펠리시테 보뇌르는 1758년 아이티 남부의 도시 레오간(Léogâne)에서 가난하지만 자유민 신분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종교 단체의 가정교사였던 엘리즈 로블로(Élise Lobelot) 숙모에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당시 아이티는 1626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생도맹그(Saint-Domingue)'로 불렸습니다. 프랑스 정착민들은 이 땅에 담배, 쪽, 사탕수수, 커피 농장을 개발했고, 삼각 무역을 통해 유입된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이 농장에서 혹사당했습니다. 마리 끌레르가 태어난 무렵, 서인도 제도 최대의 곡창이자 가장 부유한 식민지였던 생도맹그에는 약 20만 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노예제의 잔혹함, 사회 전반의 극심한 불평등, 본국이 식민지 무역에 행사하는 엄격한 통제는 결국 반란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마리 끌레르는 수레와 마차를 제작·수리하는 장인인 피에 뤼닉(Pierre Lunic)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1795년 세상을 떠나면서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아이티 혁명과 자크멜 공성전
아이티 혁명 직전의 생도맹그는 폭발 직전의 화약고와 같았습니다. 흑인 노예들은 비인간적인 노예제에서의 해방을 원했고, 백인 대농장주들은 본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치를 요구했으며, 자유민 출신의 흑인과 혼혈인들은 백인과의 법적 평등을 외쳤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식민지 백인들은 이를 자치 확대의 기회로 삼아 입헌의회에 6석의 의석을 확보했지만, 다가오는 평등권 보장과 노예제 폐지에는 강경하게 반대했습니다. 긴장이 고조되던 끝에 첫 번째 유혈 사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1791년 8월, 노예이자 부두교 사제(훙간)였던 뒤티 부크만(Dutty Boukman)은 여사제 세실 파티망(Cécile Fatiman)과 함께 부아카이망(Bois-Caïman)에서 대규모 의식을 거행했고, 이것이 노예 대반란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불과 열흘 만에 약 1,000명의 백인이 목숨을 잃고 1,800여 개의 농장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이 반란은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등의 지도 아래 독립 전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초기에는 스페인과 손잡았던 투생 루베르튀르는 1794년 프랑스가 노예제를 폐지하자 진영을 바꾸어 프랑스 편에 섰습니다.
1799년부터는 '칼의 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아이티 혁명의 두 군벌인 투생 루베르튀르와 앙드레 리고(André Rigaud)의 권력 다툼은 흑인과 물라토 계층 간의 갈등과 얽혀 1800년 자크멜(Jacmel) 공성전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마리 끌레르 보뇌르의 활약이 빛을 발했습니다. 그녀는 도시를 포위한 장자크 데살린에게 굳게 문을 닫지 말고 구호 물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줄 것을 설득했고, 덕분에 식량과 의복, 의약품을 도시로 운반해 굶주리고 다친 이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직접 거리로 나와 사람들에게 식사를 나누어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황제 장자크 데살린과의 결혼
1800년 4월, 마리 끌레르는 오랫동안 연인 관계를 이어온 장자크 데살린과 레오간에서 정식으로 결혼했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총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마리 끌레르는 남편이 이전 연인들에게서 얻은 자녀들까지 적출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중에는 아이티 혁명의 네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카트린 플롱(Catherine Flon)도 있었습니다.

1801년 투생 루베르튀르가 아이티의 종신 총독으로 선포되자, 나폴레옹은 질서 회복이라는 명목 아래 사실상 노예제 복원을 목적으로 생도맹그에 원정군을 파견합니다. 장자크 데살린은 이에 맞선 저항에 참여했으나 패배하여 프랑스에 항복했고, 투생 루베르튀르의 체포 작전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노예제 복원 소식이 퍼지자 새로운 봉기가 일어났고, 데살린은 다시 반란군의 선봉에 섰습니다. 마침내 1804년, 그는 생도맹그의 독립을 선포하고 이 땅에 원주민의 이름인 '아이티'를 되돌려 주었습니다. 종신 총독에 임명된 그는 이윽고 스스로를 '자크 1세(Jacques I)'라 칭하는 황제가 되었고, 마리 끌레르 역시 아이티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학살에 맞선 자비로운 황후
그러나 독립의 영광은 어둠과 함께 왔습니다. 장자크 데살린은 섬에 남아 있던 백인들에 대한 학살을 명령했고, 학살은 여성과 아이들에게까지 확대되었으며 약탈과 폭력이 뒤따랐습니다. 이 참극으로 3,000~5,000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자비롭고 온화하며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황후 마리 끌레르는 남편의 이러한 정책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녀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아이티의 프랑스인들을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간청했다고 전해지며, 포로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챙겨주고 학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숨겨주고 탈출로를 마련해 구해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케이프 고아'라 불리는 오르텐스와 어거스틴 드 생잔비에르(Hortense and Augustine de Saint-Janvier) 자매의 구출입니다. 부모의 하인이 숨겨준 8세와 5세의 자매는 어떤 장군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해방 노예들의 보호를 받은 뒤 황후에게 맡겨졌습니다. 마리 끌레르는 직접 두 소녀의 프랑스 송환을 주선했습니다.
몰락 이후의 말년
1806년, 자크 1세는 반란으로 전복된 뒤 암살당했습니다. 반란을 이끈 앙리 크리스토프(Henri Christophe)는 마리 끌레르와 그녀의 자녀들에게 거처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남편의 재산이 모두 몰수되면서 황후는 빈곤 속에 내몰렸고, 1843년에야 비로소 연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인이 된 데살린에 대한 존경을 담아, 1849년 즉위한 황제 포스탱 1세(Faustin I)는 그녀의 연금을 늘리고자 했지만 마리 끌레르는 이를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그녀는 손녀의 집에 기식하며 검소한 생활을 이어가다 1858년 8월, 100세가 넘은 나이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을 때조차 연민을 잃지 않았던 그녀는 오늘날까지 아이티 역사상 가장 자비로운 황후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