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의 마틸다(1046~1115)는 서임권 논쟁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이탈리아의 여성 통치자로, 뛰어난 군사적 업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교육과 혼담
마틸다는 토스카나 변경백 보니파시오 3세와 베아트리체 드 바르의 막내딸이었으며, 어머니를 통해 로렌 공작 프리드리히 2세의 외손녀이기도 했습니다. 1052년 아버지가 암살당하고 이듬해에는 언니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자녀들의 상속 재산을 지키기 위해 베아트리체는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고드프루아 2세 드 아르덴과 재혼했습니다. 마틸다는 그의 아들 고드프루아 3세와 혼약을 맺게 됩니다.
이 결혼 소식에 분노한 하인리히 3세는 이탈리아로 내려왔고, 아들 프레데릭과 함께 황제를 만나 사정을 설명하려던 베아트리체는 오히려 가혹한 조건 속에 유폐되었습니다. 프레데릭은 수감 중에 사망했고, 마틸다는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1056년 황제는 고드프루아와 강화를 맺었으며, 하인리히 3세가 사망하자 베아트리체 부부는 마틸다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마틸다는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여러 언어를 읽고 쓰며 배웠습니다. 또한 군사 교관에게 전쟁의 기술을 익혔는데, 특히 승마와 함께 창, 미늘창, 도끼, 검을 다루는 법까지 몸에 익혔습니다.
서임권 논쟁
1071년 마틸다는 시숙이던 고드프루아 3세와 결혼했지만, 그에게 경멸감만 느꼈고 두 부부는 곧 별거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해 딸 베아트리체를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아이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076년 어머니 베아트리체 드 바르와 남편 고드프루아 3세가 잇달아 사망하면서 마틸다는 이탈리아와 로렌 방면 영지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해,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서임권 논쟁이 발발합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당한 독일 왕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 성, 즉 당시 교황이 임시로 머물던 마틸다의 성을 찾아 참회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에 남은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입니다. 1080년 하인리히 4세는 다시금 파문당하자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교황에게 파문 철회를 강요하거나 폐위시키려 했습니다. 마틸다는 그레고리오 7세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나섰지만 하인리히의 동맹군에게 패배했습니다. 이후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가 옹립되었으나 게르만 제국 밖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클레멘스 3세로부터 황제 관을 받은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를 떠났습니다.
싸우는 백작부인
1085년 그레고리오 7세가 선종하자 마틸다의 세력은 새 교황 빅토르 3세를 지지하며 결집했습니다. 1087년 마틸다는 빅토르를 즉위시키기 위해 로마를 공격했지만, 황제군의 반격으로 교황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90년 마틸다는 서임권 논쟁에서 교황 편에 섰던 가문 출신인 바이에른의 벨프 2세와 재혼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다시 그녀와 전쟁을 벌였지만 1092년 카노사 성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1095년에는 노가라 성을 탈취하려 시도했으나, 백작부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마틸다는 황제에 충성을 맹세한 도시들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지휘하거나 친정(親征)하여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틸다는 1115년 통풍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오늘날까지 토스카나의 마틸다, 카노사의 마틸다, 혹은 '대백작부인(La Gran Contessa)'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