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몸에서 시작된 비운의 여걸
샤자르 앗 두르(Shajar ad-Durr, 출생 연도 미상 ~ 1257년)은 노예로 태어나 이집트 술탄의 아내가 되었고, 나아가 나라의 방위를 총괄하는 섭정에 오른 여인입니다. '진주의 숲'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녀의 일대기는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극적인 권력 상승담으로 꼽힙니다.

술탄의 노예에서 술탄의 아내로

샤자르 앗 두르의 출신과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역사학자들은 그녀를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혹은 튀르크계로 추정합니다. 이집트 술탄 알카밀의 아들인 살리흐 아이유브는 십자군이 이집트로 진군하던 시기 협상의 일환으로 티그리스 강변의 카이파 요새로 유배되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1232년부터 1238년 사이, 그는 한 노예 여성을 선물받아 그녀에게 깊이 빠졌고 '진주의 숲'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샤자르 앗 두르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할릴이 태어났지만, 불행히도 유아기에 요절했습니다. 1238년 아버지가 서거하자 살리흐 아이유브는 카이로로 향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모두 두고 오직 샤자르 앗 두르 한 사람만 곁에 두었습니다.
제7차 십자군에 맞선 이집트 방어
1244년 프랑스 국왕 루이 9세, 이른바 '성왕 루이'는 제7차 십자군 원정을 결의했습니다. 군대는 1248년 프랑스를 출발해 다음 해 이집트에 도착했습니다. 살리흐 아이유브가 다마스쿠스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이집트 방어를 지휘하는 중책은 섭정 샤자르 앗 두르의 어깨에 놓였습니다. 살리흐 아이유브는 이듬해 병환이 깊어 돌아왔고, 1249년 11월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군대의 동요를 막기 위해 샤자르 앗 두르는 술탄의 죽음을 기밀로 은폐하며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소식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자, 아들 투란 샤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자란 그는 이집트인들에게 생소한 인물이었고, 무능하다는 평가까지 받으며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미에타의 함락은 그에게 첫 번째 굴욕이었습니다.
첫 승리에 고무된 십자군은 만수라 시를 포위했습니다. 전투에서 우세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9세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이집트 영토에서 철군하는 조건으로, 나머지 포로들과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무슬림의 여왕' 즉위
투란 샤는 샤자르 앗 두르가 장악한 권력과 영지를 넘겨받으려 했고, 맘루크(해방된 노예로 구성된 정예 군단) 지도자들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는 만수라에서 루이 9세 생포의 주역이었던 바이바르스도 있었습니다. 1250년 5월, 승전 축연이 열린 자리에서 맘루크들은 투란 샤를 암살하고 샤자르 앗 두르를 왕좌에 올렸습니다. 그녀는 '무슬림의 여왕'으로 공식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 알무스타심의 종주권 아래 있었고, 그는 여성이 술탄 칭호를 갖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맘루크 아미르들에게 남성 후계자를 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샤자르 앗 두르는 수 주간 버텼지만, 결국 아미르들은 맘루크 출신의 알무이즈 이즈 앗딘 아이바크를 새 술탄으로 지명했습니다.
샤자르 앗 두르는 아이바크를 홀려 그의 첫 아내와의 이혼을 성사시킨 뒤 1250년 7월 그와 재혼했습니다. 이후 몇 년간 그녀는 남편보다 더 큰 실권을 행사하며 스스로를 '술타나(여술탄)'라 칭했고, 칙령에 서명하고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화폐까지 주조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남편의 커다란 반감을 샀고, 아이바크는 아내를 제거하고 새 아내를 들일 계획까지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1257년 4월, 샤자르 앗 두르는 선수를 쳐 남편의 암살을 지시했습니다. 아이바크는 목욕탕에서 나오던 중 교살당했습니다. 그러나 술타나는 범행을 은폐하지 못했고, 사흘 뒤 벌어진 폭동 속에서 하렘의 노예들에게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왕좌는 아이바크의 아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카이로에서 생전에 직접 건립한 영묘에 안장되어, 오늘날까지 그 화렝했던 흥망성쇠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