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라(약 500년~548년)는 평범한 가정 출신의 무희이자 기생으로 살다가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황후가 된 인물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아내입니다.
황제의 아내
테오도라의 삶은 동시대 역사가인 카이사레아의 프로코피우스와 에페소스의 요한네스가 남긴 기록을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테오도라는 서자(혼외자)로 태어났으며, 출생지는 기록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파플라고니아(소아시아), 또는 키프로스로 전해집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와 두 자매로 이루어진 가족은 극빈 생활에 몰렸습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어머니는 딸들을 무희이자 기생으로 내몰았고, 테오도라는 결국 시리아 출신 고위 관리의 정부(情婦)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신분의 한계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성공을 꿈꾼 그녀는 스스로 글 읽고 쓰는 법을 익히고 교양을 쌓으며 자신을 단련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녀는 예언자로 불린 마케도니아라는 여인을 만났고, 마케도니아는 당시 황제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이자 후일 황제가 될 유스티니아누스에게 테오도라를 알게 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보다 약 17세 연상이었지만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숙부인 황제를 설득해 원로원 의원이 기생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던 법을 철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523년에 결혼했으며, 이때 테오도라는 이미 딸 하나를 두고 있었습니다. 부부 사이에 다른 자녀는 없었습니다. 527년 남편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테오도라 역시 정식 황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532년 수도를 뒤흔든 니카 반란 당시, 궁정이 피난을 논할 때 테오도라는 "보랏빛 황포가 가장 훌륭한 수의(壽衣)가 된다"며 도주를 거부하고 남편의 강경 진압을 지지한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이 결단은 유스티니아누스가 반란을 진압하고 제권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기생들의 보호자
테오도라는 활달하고 용기 있는 성격으로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조언했으며, 특히 종교 문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녀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매춘부·기생·여배우를 보호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여러 차례 개입했습니다. 직접 매춘부들을 몸값을 치르고 구제했으며, '참회하는 죄인'을 위한 수용소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여성 관련 조항에도 영향을 미쳐 간음죄에 대한 형량 완화 등 여성의 지위 개선을 위한 법적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테오도라는 548년 세상을 떠났으며, 사인은 유방암으로 추정됩니다. 무희에서 제국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그녀의 극적인 삶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희곡, 영화, 소설의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