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아라곤의 욜랑드, '여자의 몸에 남자의 심장'을 지닌 앙주 공작부인

아라곤의 욜랑드(Yolande of Aragon, 1382년경~1442년)는 앙주 공작부인이자 멘·프로방스 백작부인, 나폴리와 예루살렘의 여왕으로서, 15세기 서유럽 정치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입니다.

나폴리 왕비가 되다

울랑드는 프랑스 국왕 장 2세(선왕)의 외손녀이기도 한 바르의 욜랑드와 아라곤 국왕 후안 1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381년에서 1384년 사이 아라곤의 사라고사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곱 형제자매 중 둘째였지만, 유일하게 어린 시절을 넘긴 자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다섯 자녀 중 성인까지 살아남은 이는 아라곤의 후아나뿐이었습니다.

1389년, 욜랑드가 어린 소녀였을 때 나폴리 국왕으로 즉위한 루이 2세의 어머니 마리 드 블루아가 주도하여 혼담이 오갔지만, 처음에는 그 제안이 거절되었습니다.

몇 년 뒤에는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마저 욜랑드에게 청혼했으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자신의 딸 이자벨 드 프랑스를 리처드 2세에게 시집보내며 이 결합을 저지했습니다. 1396년 아버지 후안 1세가 사망하자 마리 드 블루아는 마침내 욜랑드의 가족을 설득해 루이 2세와의 결혼을 성사시켰습니다. 1400년 12월 아를에서 거행된 결혼식으로 열일곱 살의 욜랑드는 나폴리 왕비가 되었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고, 그중 다섯 명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라곤 왕위 계승권

후안 1세는 생존한 남계 상속인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 후아나와 그녀의 남편이 왕위를 주장했지만, 아라곤의 상속법은 이 문제에 대해 불명확하여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었고, 결국 후안 1세의 동생 마르틴 1세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1407년 후아나가 사망하자 욜랑드는 후안 1세의 유일하게 생존한 자녀로서 왕위를 주장했고, 1410년 상속인 없이 사망한 마르틴 1세가 죽었을 때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습니다. 2년간의 분쟁 끝에 아라곤 의회는 안테케라의 페르난도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욜랑드와 그녀의 아들들은 끝내 자신들이 정당한 계승자라고 여기며 '아라곤 국왕'이라는 칭호를 계속 사용했습니다.

백년전쟁 속의 욜랑드

백년전쟁에서 아라곤의 욜랑드는 잉글랜드와 그 동맹국들에 맞서 프랑스 편에 섰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왕비 바바리아의 이자보와 함께 딸 마리 당주와 프랑스 국왕의 셋째 아들 샤를, 훗날의 샤를 7세의 혼약을 주선합니다. 형들의 죽음으로 샤를은 프랑스의 도팽(왕세자)이 되었지만, 1420년 프랑스의 패배를 의미하는 트루아 조약으로 그는 잉글랜드 국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맙니다. 모친 이자보는 아들의 폐위를 승인하고 그의 왕위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갓 과부가 된 욜랑드는 샤를을 로아르 계곡의 자신의 성으로 피신시켜 음모와 술책으로부터 보호했으며, 절대 그를 부모의 궁정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아이를 정성껏 길러 놓은 것은 당신이 그의 형제들처럼 죽게 하거나, 아버지처럼 미치게 하거나, 당신처럼 잉글랜드 사람처럼 되게 하려는 게 아니야. 이 아이는 내가 키우겠다. 감히 가져가려거든 와 봐."

프랑스 왕비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1422년 샤를과 마리 당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욜랑드는 트루아 조약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프랑스 국왕임을 선언한 사위의 장모가 되었습니다. 백년전쟁의 기점이 된 이 격변기에 욜랑드는 샤를 7세의 고문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녀는 샤를 곁의 친척, 참모, 하인들을 직접 선별하고 일부는 축출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주요 궁정에 촘촘한 인맥을 구축했으며, 사위를 포함한 권력자들의 정부가 될 미모의 젊은 여성들을 적극 등용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잔 다르크의 초기 후원자 중 한 명으로서 욜랑드는 그녀가 궁정에 들어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에는 오를레앙을 탈환한 그 군대에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지적이고 대담했던 욜랑드는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며 무엇보다 당주 가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수호했습니다.

'여자의 몸에 남자의 심장'

말년의 욜랑드는 앙제, 이후 소뮈르로 물러나면서도 끊임없이 정국의 실추를 쥐고 흔들었습니다. 그녀는 1442년 소뮈르의 튀세 성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연대기 작가 샤를 드 부르디네는 그녀를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현명하고 아름다운 공주"로 기록했습니다. 손자 루이 11세에게 그녀는 "여자의 몸에 남자의 심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