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혁명가 페트라 에레라(Petra Herrera, 1887~?)는 처음에는 '페드로 에레라'라는 남성 신분으로 혁명에 참전했다가, 이후 스스로 여성 부대를 창설해 지휘한 인물입니다.
격동의 시대, 멕시코 혁명

페트라 에레라는 1887년 6월 29일 멕시코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멕시코는 독립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독립 이후의 분쟁으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1876년부터는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 대통령의 권위주의 체제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부패와 인종차별, 극심한 불평등, 폭력적인 탄압이 만연했으며, 원주민 공동체와 농민, 노동자들은 착취와 가난, 폭력에 특히 크게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시민권이나 정치적 권리는커녕 가족 안에서 남성들의 지배 아래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회 모든 계층에서 디아스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초기 봉기들은 잔혹하게 진압되었습니다. 20세기 초에는 정치·경제·환경적 요인들이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대지주들에게 유리한 농업 정책으로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어 농민의 95%가 땅을 소유하지 못했고, 1907년 금융 위기로 전반적인 소득이 감소했으며, 1908년과 1909년의 가뭄으로 옥수수를 수입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세금 인상까지 겹치면서 반대 신문들이 창간되고 파업과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1907년에는 동부 지역 섬유 산업 노동자들의 파업이 베라크루스에서 거의 200명이 목숨을 잃는 학살로 끝나기도 했습니다.
1908년, 디아스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10년 선거에 출마할 의향이 없다고 밝히며 야당 결성을 허용했습니다. 이듬해 여러 정당이 설립되었고, 그중에는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Madero)가 이끄는 정당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910년, 디아스는 결국 출마했고 마데로가 그의 상대가 되었습니다. 정부는 마데로가 여론을 부추겨 대통령에 맞선다고 비난했고, 마데로는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된 뒤 디아스의 압승이 선언되자 텍사스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고 11월 20일 봉기를 촉구했으며, 토지 반환을 공약에 담았습니다. 혁명은 1911년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나 판초 비야(Pancho Villa) 같은 반군 지도자들의 지휘 아래 기세를 더해갔습니다.
'솔다데라', 혁명의 그림자에서
바로 여기서 페트라, 아니 '페드로' 에레라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혁명 이전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멕시코 북부 출신으로, 원주민 또는 메스티소(원주민과 유럽인의 혼혈) 농민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디아스 정권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었든, 마데로의 토지 개혁 공약에 대한 기대였든, 아니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열망이었든, 그녀는 어떤 형태로든 혁명에 참여할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성에게 허용된 역할은 간호나 물자 보급 같은 후방 지원뿐이었습니다. 이를 거부한 페트라는 머리를 자르고 남성 옷을 입고 가슴을 감춘 뒤, '페드로 에레라'라는 이름으로 판초 비야 장군의 부대에 합류했습니다. 그녀는 곧 용맹함, 뛰어난 사격 실력, 다리를 폭파하는 폭발물 전문성, 무엇보다도 지휘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매일 아침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실하게 면도를 하는 등 여성이라는 정체를 꼼꼼히 숨겼지만, 거짓은 점점 그녀를 짓눌렀습니다. 2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위치에 올랐을 때, 그녀는 자신이 이미 실력을 증명했다고 믿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여자다. 그리고 앞으로도 군인으로서 복무할 것이다." 그러나 '페드로'의 지휘 능력을 높이 평가하던 군대는 여성인 페트라에게는 어떤 군 계급도 부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400명의 여성 대대를 이끌다
군에서 배제된 페트라 에레라는 400명의 솔다데라(soldadera), 즉 여성 병사들로 이루어진 대대를 직접 조직했습니다. 이 부대를 이끌고 그녀는 1914년 5월 제2차 토레온 전투에 참전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판초 비야의 동료였던 코스메 멘도사 차비라(Cosme Mendoza Chavira)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Ella fue quien tomó Torreón y apagó las luces cuando entraron en la ciudad"(토레온을 점령한 것은 바로 그녀였으며, 도시에 진입할 때 불을 끈 사람도 그녀였다). 용감한 페트라 에레라를 기리는 혁명가요도 이 무훈을 노래했지만, 판초 비야조차 그녀의 공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솔다데라는 첫날처럼 확고한 의지로 혁명을 위해 싸웠습니다. 여성만으로 구성된 전투 대대를 이끌며 그녀는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부대의 안전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그녀는 남성의 캠프 출입을 금지했고, 위병에게는 침입자를 발견하면 즉시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성의 혁명 참여는 결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판초 비야를 포함한 많은 혁명 지도자들이 그들을 경멸했고 심지어 적대시했으며, 알바로 오브레곤(Álvaro Obregón)은 솔다데라를 부대의 방패로 이용하기까지 했습니다.
1917년, 페트라 에레라는 여성의 혁명 참여에 좀 더 우호적이었던 혁명 장군 베누스티아노 카란사(Venustiano Carranza)와 손을 잡았습니다.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카란사는 전사자 유족인 미망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했고, 페트라에게 대령 계급을 수여했습니다. 전투가 잦아들면서 그녀의 여성 대대는 해산되었습니다.
혁명 말기 페트라의 삶은 혁명 이전의 세월만큼이나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술집에서 웨이트리스를 하며 스파이로 활동했거나, 반혁명세력에게 암살당했거나, 혹은 2만 5천 명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여단을 조직했다고 합니다. 다른 솔다데라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혁명에서의 역할은 가려졌고, 결국 역사의 뒤편으로 잊혀져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