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신분에서 탈출한 아라민타 로스, 즉 해리엇 터브먼(1820~1825년경 출생 – 1913년 별세)은 노예제와 인종차별에 맞서 평생을 싸운 인권 운동가였습니다.
주인들의 폭력
아라민타 로스는 1820년에서 1825년 사이 미국 메릴랜드의 한 플랜테이션에서 노예 부모인 할리엇 그린과 벤 로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자녀 중 다섯째였던 그녀의 유년기는 험난했습니다. 세 명의 언니들은 팔려나가 가족과 영원히 헤어져야 했고, 농장주 에드워드 브로데스가 막내 동생마저 팔려 하자 어머니 할리엇 그린은 굳건히 저항하여 끝내 판매를 철회시켰습니다.
'민티'라는 별명으로 불린 아라민타는 어린 나이부터 남동생들을 돌보았습니다. 다섯 살 무렵부터 여러 주인 밑에서 일하며 잦은 구타와 채찍질을 견뎌야 했습니다. 특히 10대 시절에는 도망치던 노예 대신 머리에 심한 타격을 입어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녀는 일평생 발작과 실신을 반복했지만, 독실한 신앙심 덕분에 겪은 환상과 꿈을 신성한 계시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자유의 획득
성장한 그녀는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할리엇'이라는 이름을 택했고, 1844년경 자유민인 존 터브먼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팔려갈까 두려움을 느낀 그녀는 주인이 사망하자 1849년 9월 17일 첫 탈출을 시도합니다. 남편은 따라오기를 거부했고, 오빠들 벤과 헨리와 함께 떠났지만 두 사람은 공포에 질려 결국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번에는 홀로 다시 탈출에 나섭니다. 퀘이커 교도와 노예제 폐지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노예제가 80년 전에 폐지된 펜실베이니아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흑인의 모세
자유를 손에 넣은 해리엇 터브먼은 곧바로 아직 노예 신분인 가족들을 떠올렸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당시 노예제를 폐지한 주들조차 도망 노예를 체포하는 데 협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1850년 12월, 조카와 그 자녀들이 팔려 가족과 헤어질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녀는 메릴랜드로 돌아가 이들이 탈출해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도록 도왔습니다.
이후 남편을 찾으러 다시 갔지만, 남편은 이미 재혼한 상태로 함께 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실망 속에서도 네 명의 오빠와 다른 노예들이 펜실베이니아와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열세 차례의 비밀 원정에서 약 70명의 노예를 자유로이 인도한 그녀는 '흑인의 모세'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남북전쟁과 인권 운동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해리엇 터브먼은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처음에는 군 캠프에서 요리사와 간호사로 복무했고, 이후 첩보 그룹을 이끌었습니다. 정찰대와 함께 미지의 지형을 답사하며 지도를 작성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플랜테이션에 대한 습격 작전을 조직하는 데 관여하며 공격 현장에 직접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인권 운동가로서 활동하며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습니다. 수전 B. 앤터니와 함께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1869년에는 전기 작가의 도움으로 그녀의 이야기가 『해리엇 터브먼의 삶의 장면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같은 해 남북전쟁 참전 용사 넬슨 데이비스와 재혼했습니다.
해리엇 터브먼은 1913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으며, 군 장례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그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