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현대 간호학을 연 개척자의 생애

영국의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은 현대 간호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독감 유행과 소명의 깨달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현대 간호학을 연 개척자의 생애1820년 5월 12일에 태어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영국 상류층 출신인 프랜시스 '패니' 스미스와 윌리엄 에드워드 쇼어 부부의 둘째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가족이 2년간의 유럽 여행 중 머물렀던 이탈리아 피렌체(Florence)에서 따온 것입니다. 1820년 말 가족은 영국으로 돌아와 햄프셔에 있는 엠블리 파크라는 넓은 저택에 정착했습니다.

플로렌스는 부모에게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그리스어는 물론 역사와 철학까지 두루 배우며 자랐습니다. 지역사회 봉사를 중시하는 유니테리언 교회 신도였던 나이팅게일 가족은 인근 빈민들의 의료비를 후원했고, 어린 플로렌스는 자연스럽게 사회적 약자의 삶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열일곱 살 무렵, 지역에 독감이 크게 유행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병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플로렌스는 몇 주 동안 주변 환자들을 돌보며 간호와 위로를 나누었고, 이 경험 속에서 일종의 계시, 즉 소명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며 그분의 일에 부르셨다."

병자 간호를 향한 소명

1839년, 수학을 공부하는 사촌이 집에 머문 것이 계기가 되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수학 공부에 매진했고, 개인 교사까지 두며 특히 통계학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공부와 병행하여 그녀는 상류층의 사교계 생활, 즉 가정 방문과 무도회를 즐겼는데, 이 시기에 찰스 다윈과 컴퓨터 과학 역사상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불리는 수학자 에이다 러브레이스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1844년, 그녀는 미국 의사 새뮤얼 그리들리 하우를 만나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털어놓으면서도, 상류층 출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라는 두려움을 고백했습니다. 하우는 그녀가 자신의 소명을 따르도록 격려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병원과 요양소에서 관리 부재나 무능함으로 환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그녀는 의료 서비스 개선과 간호사 양성 제도 확립에 헌신하기로 결심합니다.

1845년 여름, 플로렌스는 부모에게 간호사가 되겠다는 뜻을 밝히고 병원에서 수련을 받은 뒤 요양 시설을 설립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단호히 거부했고, 몇 달 뒤 다시 청했을 때도 같은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의료계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고 영국과 이탈리아의 병원을 직접 방문했으며, 공중보건 관련 서적과 보고서를 폭독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등지를 널리 여행하며 다시 한번 신의 부름을 느꼈다고 합니다. 독일 뒤셀도르프 근처 카이저스베르트에서는 부제수녀들이 운영하는 병원을 둘러보고 그곳의 탁월한 간호 수준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이루어진 의학 수련

1851년, 마침내 부모의 허락을 받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카이저스베르트 병원에서 3개월간 수련하며 상처 치료, 약 조제, 환자 돌봄을 익혔습니다. 이 경험은 그녀의 소명을 더욱 굳건히 해주었고, 첫 저서 『라인 강변 카이저스베르트 부제수녀 실무 수련 기관』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그녀는 파리로 건너가 수련을 이어갔습니다. 1853년 8월에는 런던의 한 요양원 운영직을 수락하여 '병약한 여성들을 위한 요양 협회(Institute for the Care of Sick Gentlewomen)'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이 기관은 개인 간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좋은 집안의 여성들을 돌보던 곳이었고, 플로렌스는 빠르게 명성을 쌓으며 곧 런던 킹스 칼리지 병원(사우스워크)의 수간호사로 발탁될 예정이었습니다.

크림 전쟁, '램프를 든 여인'

1854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영국·프랑스 간의 크림 전쟁이 시작되면서 영국군이 전선으로 떠났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최전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콜레라, 이질, 각종 감염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종군 기자들이 이러한 인명 손실과 영국군의 열악한 위생 상황을 언론에 알렸고, 특히 영국군이 프랑스군에 비해 후송 및 간호 체계가 뒤떨어진다는 점이 지목되었습니다. 이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 그룹을 최전선으로 파견하기로 결심합니다. 영국 당국의 승인을 얻었지만, 여성을 전장에 보내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여론을 뚫고, 그녀는 1854년 10월 21일 대부분 종교인 출신인 38명의 자원 간호사들과 함께 크림 반도로 향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들이 마주한 것은 참담한 위생 실태였습니다. 부족한 인력, 방치된 부상병, 바닥난 약품, 위생 불량으로 인한 무수한 감염 사망이 그것이었습니다. 플로렌스와 자원 간호사들은 병원을 철저히 청소하고 간호 체계를 재편했습니다. 그러나 과밀 수용, 하수 시설 결함, 감염병까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위생 위원회가 도착할 때까지 병사들은 수없이 희생되었습니다. 밤마다 램프를 들고 환자 곁을 지키던 그녀는 이 무렵 '램프를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이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이 경험은 그녀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고, 높은 사망률의 원인이 열악한 위생 환경에 있다고 확신시켰습니다. 이후 그녀는 병원 설계에서 위생 요소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나이팅게일 기금과 간호학교 설립

1857년 8월 영국으로 돌아온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영웅으로 환영받았습니다. 그러나 크림에서 앓은 병으로 한동안 방에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요청에 따라 육군 보건 왕립 위원회를 위해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상세한 통계와 수많은 개선 권고안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는 통계학을 의료 분야에 적용한 선구자였습니다. 크림 전쟁에서의 공로를 기려 간호 교육을 위한 모금 목적으로 '나이팅게일 기금(Nightingale Fund)'도 조성되었습니다.

1860년, 이 기금의 지원으로 그녀는 간호학교인 '나이팅게일 간호학교'(현재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간호·조산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같은 해, 그녀는 간호 입문서이자 학교 교육 과정의 기초가 된 『간호 노트(Notes on Nursing)』를 출간했습니다.

1869년에는 엘리자베스 블랙웰과 함께 '여성 의과대학(Women's Medical College)'을 설립했습니다. 1870년대에는 훗날 미국 간호계의 선구자가 되는 린다 리차즈를 훈련시켰습니다. 그녀의 학교에서 배출된 간호사들은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수많은 병원의 수간호사가 되며 간호업 전반에서 영향력을 넓혀갔습니다. 1883년에는 로열 레드 크로스 훈장을 받았고, 1907년에는 메리트 훈장(Order of Merit)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1896년부터는 거동이 불편해 누워 지냈음에도 병원 경영에 관한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910년 8월 13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