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Victoria, 본명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1819~1901)는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여왕으로, 캐나다의 여왕, 인도 제국의 여제, 오스트레일리아의 여왕이기도 했습니다. 무려 63년에 달하는 재위 기간은 영국 역사상 가장 긴 통치 기록 중 하나로 꼽힙니다.
엄격한 유년기와 교육
1819년 5월 24일에 태어난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는 독일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빅토리아와,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 아우구스투스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재혼 전 슬하에서 찰스와 페오도라 두 자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태어날 당시 빅토리아는 영국 왕위 계승 서열 5위였으나, 이듬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계승 순위가 크게 올라갔습니다.
빅토리아의 유년기는 매우 엄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또래 아이들과 분리된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철저한 궁정 예법을 따라야 했고, 어머니와 같은 방을 사용했으며 가정교사에게 개인 수업을 받았습니다. 특히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1827년과 1830년에 숙부 두 명이 차례로 사망하면서, 11세의 빅토리아는 마지막으로 남은 숙부 윌리엄 4세의 왕위 추정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어머니와 관리인 존 코노이는 소녀를 데리고 잉글랜드와 웨일스 곳곳을 여행했고, 그녀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자 앨버트와의 결혼
1836년, 벨기에 국왕이 된 외삼촌 레오폴드는 빅토리아를 자신의 조카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자 앨버트와 결혼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두 사람은 1836년 5월 처음 만났고, 빅토리아는 즉시 앨버트에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직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정식 약혼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1837년 6월 20일 윌리엄 4세가 붕어하자 빅토리아는 영국과 영국령 식민지의 여왕으로 즉위했으며, 1838년 6월 28일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멜번 경(Lord Melbourne) 총리가 이끌었는데, 그는 젊은 여왕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즉위 초기 대중적 인기가 높던 빅토리아는 1839년 궁정 스캔들로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시녀 한 명이 혼외 임신을 했다는 의혹이 일었고, 검진 결과 해당 시녀가 처녀임이 밝혀지자 오히려 헛소문을 퍼뜨린 사람으로 여왕이 지목되어 공개 석상에서 야유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10월, 앨버트를 다시 만난 빅토리아는 그에게 다시 사랑에 빠졌고, 10월 15일 직접 청혼했습니다. 결혼식은 1840년 2월 10일 거행되었습니다. 빅토리아는 남편을 깊이 사랑했으며, 앨버트는 여왕 곁에서 중요한 정치 고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부부는 슬하에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기근의 여왕"
결혼 직후 임신한 여왕은 첫 임신 중 암살 미수 사건을 겪지만, 발사된 총알은 빗나갔습니다. 이 사건은 오히려 빅토리아의 인기를 크게 끌어올렸습니다. 이후에도 여왕은 여러 차례 공격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1842년 5월에는 존 프랜시스가 여왕의 마차를 향해 총을 쏘려다 리볼버가 고장 나 실패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존 윌리엄 빈이 총을 쐈지만 화력이 너무 약했습니다. 1849년에는 윌리엄 해밀턴이 마차를 겨냥해 발사했고, 1850년에는 전직 경찰 로버트 페이트가 지팡이로 습격했습니다. 1882년 3월에는 시인 로더릭 매클레인이 마차를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1845년, 곰팡이성 역병이 확산되면서 북유럽 전역, 특히 아일랜드를 대기근이 강타했습니다. 4년 동안 100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굶어 죽었고,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이민을 떠났습니다. '기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빅토리아는 기근 구호를 위해 개인 후원자 중 가장 많은 기부를 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군주 간 회담을 여러 차례 주선했습니다. 1848년 파리 시민들의 봉기에 놀란 여왕은 프랑스 혁명이 잉글랜드로 번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될 때까지 와이트 섬에 잠시 피신했습니다.
1853년, 빅토리아는 여덟째 출산 과정에서 클로로포름 마취를 시험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효과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녀는 성직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57년에도 클로로포름을 다시 사용했습니다. 1855년에는 영국의 동맹국인 나폴레옹 3세가 런던을 방문했고, 왕실 부부도 같은 해 답방을 했습니다. 1858년 프랑스 황제가 영국에서 제작된 폭탄을 이용한 테러의 표적이 되면서 외교적 위기가 일어나 내각이 총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영프 양국 관계에는 큰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유럽의 할머니'
1858년 1월, 앨버트와 빅토리아의 첫째 딸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와 결혼했습니다. 딸을 배웅하는 일은 여왕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후 자녀들이 유럽 각국 귀족들과 혼인을 거듭하면서 빅토리아는 '유럽의 할머니'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1861년 3월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애도 기간 동안 앨버트가 많은 국정 업무를 대신 맡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4일, 앨버트가 장티푸스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빅토리아는 평생을 애도 속에 보내며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물게 드러내고 은둔 생활을 했지만, 국정 업무는 계속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은둔은 공화주의 운동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여성 참정권에는 반대 입장이었던 빅토리아는 1867년 선거권을 갖는 남성의 범위를 넓힌 개정법(Reform Act)을 지지했습니다. 1870년, 프랑스에 제3공화국이 수립되자 공화주의 집회가 빅토리아의 퇴위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1871년에는 여왕 본인과 아들인 웨일스 공이 연달아 위독해졌지만 두 사람 모두 회복했고, 그 결과 인기가 되살아나면서 공화주의 운동은 힘을 잃었습니다.
1893년 3월, 계단에서 넘어져 몇 달간 절뚝거려야 했던 74세의 여왕은 류마티즘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1884년에는 1868년 출간된 『하이랜드 생활 저널』(Leaves from the Journal of Our Life in the Highlands)의 후속편인 『하이랜드 생활 저널 계속』(More Leaves from a Journal of a Life in the Highlands)을 출간했습니다. 1887년에는 대중적 사랑을 받는 여왕의 즉위 50주년인 '골든 주빌리'가 대영제국 전역에서 성대하게 축하되었고, 1897년에는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맞이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영국 역사상 최장기 재위 군주였으며, 이 기록은 2015년 9월 9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경신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빅토리아는 1901년 1월 22일,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 7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