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나탈리 르멜, 파리 코뮌에 헌신한 아나키스트·페미니스트 활동가

나탈리 뒤발 르멜(Nathalie Duval Lemel, 1827~1921)은 프랑스의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 활동가입니다. 그녀는 1871년 파리 코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유명한 혁명가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과 함께 누벨칼레도니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제1인터내셔널과의 만남

나탈리 르멜, 파리 코뮌에 헌신한 아나키스트·페미니스트 활동가나탈리 뒤발은 1827년 8월 26일 프랑스 브레스트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부모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12세까지 교육을 받은 뒤 제본 분야의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845년, 18세의 나이에 여덟 살 연상의 동료 제롬 르멜(Jérôme Lemel)과 결혼하여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4년 후 부부는 캉페르(Quimper)로 이주해 서점 겸 제본소를 운영했지만, 1861년 파산하면서 생계를 위해 파리로 떠나야 했습니다.

수도 파리에서 나탈리는 제본 공장에서 계속 일하며 노조에 가입하고 사회주의 활동가로 성장했습니다. 1864년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협회, 이른바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었고, 나탈리는 그다음 해인 1865년에 가입했습니다. 파업이 일어날 때마다 앞장서서 현장 대표(shop steward)로 선출되었고 파업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특히 남녀 동일임금을 강력히 요구하며 확고한 의지를 인정받았습니다.

파리 코뮌과 여성연맹 창설

1868년, 남편 제롬의 알코올 중독 문제로 나탈리는 가정을 떠나 더욱 활동적인 삶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식품 협동조합과 노동자 식당을 설립해 직접 식사 준비에도 참여하며 노동자들의 상생을 위해 힘썼습니다.

1871년 3월 파리 코뮌이 봉기하자, 여성 운동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내던 나탈리는 같은 해 4월 러시아 출신 혁명가 엘리자베트 드미트리예프(Elisabeth Dmitrieff)와 함께 '여성연맹'을 창설했습니다. 이 단체는 페미니즘을 내세우고 여성의 참정권과 동일임금을 요구한 초기 운동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1871년 5월 21일 베르사유군이 파리 시내로 진입하자, 나탈리는 바리케이드 전투에 직접 참전하고 부상자들을 돌보며 5월 28일 코뮌이 패배할 때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했습니다.

유배와 말년

체포된 나탈리는 누벨칼레도니 유배형을 선고받고 활동가 루이즈 미셸과 같은 배에 올랐습니다. 유배지에서 그녀는 루이즈 미셸에게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80년 사면법이 시행되면서 두 사람은 프랑스 본토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 나탈리는 신문 랭트란시잔(L'Intransigeant)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평생을 여성의 권리를 위한 운동에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말년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나탈리 르멜은 1921년 이브리쉬르센(Ivry-sur-Seine)에서 빈곤 속에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