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스(Ching Shih, 1784~1844)는 '정일소(Chang I Sao)' 또는 '칭 부인(Madame Tsching)'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남중국의 공포(Terror of South China)'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해적 함대 중 하나를 지휘했으며, 그 위력이 워낙 대단하여 어떤 국가의 해군도 끝내 이 함대를 격파하지 못했다.
홍기함대(紅旗艦隊)의 탄생
칭스의 유년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녀는 처음에 스양(Shih Yang)이라는 이름의 광둥 출신 창부로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해적들에게 붙잡힌 그녀는 1801년 당대 명망 높은 해적 정일(Cheng I)과 결혼했다. 남편 정일은 17세기부터 대대로 해적 행위를 해온 집안의 후손으로, 자신의 명성과 상당한 무력을 바탕으로 무려 400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강력한 해적 연합 함대를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 함대는 '홍기함대(Red Flag Fleet)'라 불렸다. 칭스(그녀의 이름은 '정의 미망인'이라는 뜻이다)와 정일 부부는 양자 장바오(Chang Poa)를 들여 함께 살았다.
1807년, 정일이 베트남에서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은 즉시 권력 장악에 나섰다. 그녀는 정교한 정치적 술책과 개인적 인맥 구축을 통해 고인이 된 남편의 가문과 자신에게 충성하는 해적 선장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해적 연합에 대한 통제권을 굳건히 다진 그녀는 양자 장바오를 곁에 두어 홍기함대 운영을 보좌하게 했다. 두 사람은 몇 주 만에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훗날 결혼에 이르렀다.
방대한 함대를 하나로 묶기 위해 칭스는 엄격하고 철저히 시행되는 법률 코드를 제정했다. 함대 지휘부가 전달하지 않은 명령을 내리는 행위, 명령 불복종, 해적들을 도운 마을에 대한 약탈, 전리품을 공동으로 모으지 않는 행위, 심지어 포로를 강간하는 행위까지 여러 위반 사항은 사형에 처해졌다. 덜 심각한 위반에는 태형, 쇠고랑, 고립 감금 등의 처벌이 마련되었으며, 탈영한 해적에게는 귀를 잘랐다. 이러한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해적선에 억류되었던 포로 리처드 글래스풀(Richard Glasspoole)은 이 법규가 "공격에 있어서는 두려움을 모르고, 방어에 있어서는 필사적이며, 수적으로 열세에 놓여도 끝내 굴복하지 않는 무력을 길러냈다"고 기록했다.
남중국의 공포
칭스의 연합 함대는 상선들을 약탈하고 강변의 마을들을 유린했다. 당시 영국인들은 그녀를 일종의 경외감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남중국의 공포'라고 불렀다. 1808년 정부는 이들을 비롯한 해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함선을 파견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배를 나포할 때마다 해적 함대는 더욱 강력해졌다. 반면 경쟁 해적 오보태(O-po-tae)는 한 차례 전투에서 칭스를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해적 여제의 보복이 두려웠던 오보태는 자신과 부하들을 위해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아냈고, 이후 왕실 함대는 칭스의 함대와의 전투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홍기함대를 꺾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정부는 1810년 모든 해적에게 사면을 제안했고 칭스는 이를 수락했다.
전리품을 그대로 챙긴 칭스는 광저우에서 창관(妓館)을 열었다. 그녀는 1844년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참고 자료
칭스 위키피디아 페이지
칭스 영문 위키피디아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