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새라 위너무카: 아메리카 원주민 권리를 위해 싸운 파이우트족 작가

새라 위너무카(Sarah Winnemucca, 본명 토크멘토니(Thocmentony), 1844년경 ~ 1891년)는 파이우트족 출신의 아메리카 원주민 작가입니다. 그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를 위한 강력한 옹호자로서, 특히 자신의 민족이 강제 이주된 보호구역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기 위해 평생을 싸웠습니다.

이중문화 속에서 성장하다

새라 위너무카는 1844년경 미국 네바다주의 훔볼트호(Lake Humboldt) 근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파이우트족 소규모 무리의 지도자였던 위너무카의 네 자녀 중 둘째였습니다. 할아버지 트루키조(Tru-ki-zo)는 이 지역을 탐사하기 시작한 유럽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지역 측량을 돕고 많은 백인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1850년경, 새라가 여섯 살 무렵 가족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어른들은 목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세 살이 되던 해 새라는 여동생 엘마와 함께 정착민 가정에 들어가 그 집 딸의 친구가 되어주고 가사 일을 돕는 한편, 영어를 배우며 유럽계 미국인 문화에 익숙해졌습니다. 새라는 가족 모두가 구사하던 영어를 읽고 쓰는 법을 익혔고, 자연스럽게 이중문화를 지닌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새라 위너무카: 아메리카 원주민 권리를 위해 싸운 파이우트족 작가

피라미드호 전쟁

1859년, 파이우트족과 이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날로 심해지는 가운데 새라와 엘마는 아버지를 따라 네바다로 돌아왔습니다. 지역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수많은 이주민이 몰려들었고, 충돌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1860년, 파이우트족은 자기 무리의 소녀 두 명이 납치되어 유폐되어 있던 잡화점을 습격해 불을 질렀고, 이 과정에서 세 명의 남성이 사망했습니다. 이에 광부들과 정착민들은 민병대를 조직했고, 피라미드호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새라의 사촌인 영 위너무카(Young Winnemucca)를 비롯한 파이우트족은 더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주었고, 두 차례의 격전 끝에 휴전이 성립되었습니다.

파이우트족 학살

1861년 네바다는 미국 영토가 되었고, 초대 주지사 제임스 W. 나이(James W. Nye)는 파이우트족을 접견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파이우트족 마을을 습격하고 소떼 도둑 혐의 등 온갖 비난을 퍼부으며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1865년, 앨먼드 B. 웰스(Almond B. Wells) 대위는 '네바다 자원병'을 이끌고 파이우트족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습격을 감행했습니다. 새라와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웰스는 위너무카 진영을 공격해, 그곳에 있던 30명 중 아이들과 노인들 29명을 학살했습니다. 위너무카의 두 아내, 즉 새라의 어머니와 어린 이복동생도 이날 살해당했습니다.

1868년, 이러한 무차별 학살에서 살아남은 약 500명의 파이우트족이 네바다 자원병들의 공격을 피해 미군의 맥더밋 요새(Fort McDermitt)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새라는 에드워드 바틀렛(Edward Bartlett) 중위를 만나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결혼했지만, 남편에게 버려져 다시 맥더밋 요새로 돌아왔습니다. 4년 뒤 말루어 보호구역(Malheur Reservation)이 설립되자 파이우트족과 배녹족(Bannock)이 그곳에 정착했고, 새라도 아버지와 동생 나체즈(Natchez)와 함께 합류했습니다.

배녹 전쟁과 통역사로서의 새라

새라 위너무카: 아메리카 원주민 권리를 위해 싸운 파이우트족 작가

보호구역에서 새라 위너무카는 말루어 보호구역의 부족들을 담당하는 인디언 관리관 새뮤얼 B. 패리시(Samuel B. Parrish)의 통역사로 일했습니다. 패리시는 파이우트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농업 프로그램 설립을 지원했고, 보호구역에 학교를 지었으며 새라는 그곳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1876년, 파이우트족의 큰 아쉬움 속에 패리시가 새 관리관 윌리엄 V. 라인하트(William V. Rinehart)로 교체되었습니다.

라인하트의 정책은 전임자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공동 농장에서의 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파이우트족을 위한 물자를 착복했으며, 백인에게 토지를 넘겨주기 위해 원주민들을 강제 퇴거시키고 수많은 부족 지도자들을 적으로 돌렸습니다. 학대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1878년 거의 모든 파이우트족과 배녹족이 보호구역을 떠났습니다. 배녹족은 고립된 정착민 거점들을 습격했는데, 파이우트족도 이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새라는 훗날 자신과 다른 가족들이 배녹족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사건들이 배녹 전쟁(Bannock War)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몇 주간 지속되어 약 30명의 사망자를 낸 이 전쟁에서 새라는 통역사로 활약하며 함께 일한 장교들 사이에서 탁월한 평판을 얻었습니다. 일부 장교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새라는 부패한 인디언 관리관 대신 미군이 원주민 보호구역을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파이우트족은 야카마 인디언 보호구역(Yakama Indian Reservation, 현재도 존재)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곳에서 극심한 빈곤과 가혹한 환경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민족을 위한 목소리, 그리고 자서전

일자리가 있어 의무가 없었음에도 새라 위너무카는 통역사로서 자신의 민족과 함께 보호구역에 동행했습니다. 파이우트족이 겪는 참상에 분노한 그녀는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에서 민족의 처지를 알리는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1879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워싱턴으로 향해 파이우트족의 처우를 호소하고 야카마 보호구역에서의 해방을 탄원했습니다. 그 결과 파이우트족이 말루어 보호구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냈지만, 정부는 도중에 백인들의 보복이나 새로운 습격이 우려된다며 결국 해당 구역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1881년 새라는 인디언 부서 직원인 루이스 H. 홉킨스(Lewis H. Hopkins) 중위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미국 북동부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끊임없이 강연을 이어가며, 아메리카 원주민이 처한 운명에 대해 여론을 일깨우고자 노력했습니다. 언론은 그녀의 연설을 자주 보도했고, 그녀를 '파이우트 공주'라 불렀습니다. 보스턴에서 새라는 엘리자베스 피바디(Elizabeth Peabody)와 메리 피바디 만(Mary Peabody Mann) 자매를 만났고, 이들은 그녀의 활동을 격려하며 연설문과 강연록의 출판을 도왔습니다.

1883년, 그녀의 책 『파이우트족 사이의 삶(Life Among the Piutes)』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이 쓴 최초의 자서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85년 새라는 네바다로 돌아와 파이우트 문화와 언어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원주민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연방 정부가 원주민 아동 대상 영어 교육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녀의 학교는 2년 만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라 위너무카는 1891년 10월 16일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남긴 기록과 투쟁의 발자취는 오늘날까지 아메리카 원주민 권리 운동의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