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수젯 라 플레시,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를 위해 싸운 작가이자 활동가

수젯 라 플레시(Susette La Flesche), 즉 라플레시 티블스(LaFlesche Tibbles)는 오마하어로 인샤타 툼바(Inshata Theumba), '밝은 눈동자(Bright Eyes)'라고도 불렸습니다. 오마하(Omaha)족 출신의 아메리카 원주민 작가이자 연설가, 예술가였던 그녀는 평생을 원주민 권리 운동에 바친 인물입니다.

문화 동화를 선택한 가문

1854년 네브래스카에서 태어난 수젯은 어머니 메리 게일(Mary Gale)과 아버지 조지프 라플레시(Joseph LaFlesche), 이른바 '철안(Iron Eye)'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메리는 아이오와족 여성 니코마(Ni-co-ma)와 외과의사 존 게일(John Gale)의 딸이었고, 아버지 조지프는 프랑스 이민자와 폰카(Ponca)족 여성 와우윙차(Waoowinchtcha)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조지프는 오마하족 족장의 양자로 들어가 그의 뒤를 이었으며, 오마하족의 마지막 전통 족장이 되었습니다.

수젯은 갓 태어난 지 약 1년 만에 친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이후 아버지 조지프는 오마하족 여성과 재혼하여 다른 자녀들을 두게 됩니다.

오마하족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던 라플레시 가는 자녀들과 부족의 미래를 위해 문화 동화(cultural assimilation)를 지지했습니다. 이들은 선교학교를 후원하고 다섯 자녀를 위해 백인 교사를 고용했습니다. 수젯과 여동생 마르그리트, 수잔은 뉴저지의 여학교에 보내져 훌륭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수젯은 곧 학업, 특히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드러냈고, 졸업 후에는 오마하 보호구역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스탠딩 베어 재판

폰카족이 네브래스카의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에서 쫓겨나 현재의 오클라호마에 해당하는 인디언 준주로 강제 이주당하자, 폰카족 혈통을 지닌 수젯과 아버지는 직접 현지를 찾아 이주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참혹한 현실을 목격합니다. 해가 깊어서야 이루어진 강제 이주로 농작물을 파종할 수 없었고, 정부가 약속한 물자는 제때 도착하지 않았으며, 말라리아까지 창궐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주 후 첫해에 부족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에는 스탠딩 베어(Standing Bear) 추장의 아들도 있었습니다.

스탠딩 베어 추장이 몇몇 부족민과 함께 보호구역을 떠나 아들의 유해를 조상의 땅에 안장하려 하자, 연방 정부는 그들을 체포했습니다. 수젯은 기자 토머스 티블스(Thomas Tibbles)와 손잡고 『오마하 월드 헤럴드(Omaha World Herald)』에 폰카족 강제 이주의 참상을 폭로하며 스탠딩 베어의 체포를 규탄했습니다. 이 보도 덕분에 스탠딩 베어는 재판에서 두 변호사의 무료 변론을 받을 수 있었고, 수젯은 통역사로 재판에 참여해 보호구역의 열악한 생활 실태를 직접 증언했습니다.

스탠딩 베어는 체포와 구금에 정당한 사유가 없다며, 아메리카 원주민 역시 미국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는 소송에서 승리했고, 이 재판은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며 아메리카 원주민 시민권 운동의 상징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강연 활동과 결혼, 그리고 평생의 투쟁

재판 이후 수젯은 민족학자가 된 이복 동생 프랜시스(Francis La Flesche)와 함께 스탠딩 베어의 미국 동부 강연 순회에 동행했습니다. 수젯은 스탠딩 베어의 연설을 통역하는 한편 스스로도 강연 무대에 올랐습니다. 또한 토머스 티블스와 함께 워싱턴의 의회 위원회에 출석해 폰카족 강제 이주의 실태를 증언하고 원주민의 권리를 호소했습니다.

1881년 수젯은 토머스와 결혼하여 네브래스카에 정착했습니다. 그녀는 소설, 단편, 에세이를 집필하는 한편, 오마하 보호구역의 일원으로서 조상의 문화를 지키는 일에도 헌신했습니다. 부부는 계속해서 원주민 보호구역의 생활 실태를 조사하고 기록하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887년에는 스탠딩 베어와 함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강연 순회에 나섰습니다. 1890년에는 미군이 라코타 미니콘주(Lakota Miniconjou)족 300~350여 명을 학살한 운디드니 학살(Wounded Knee Massacre)을 공개적으로 규탄했습니다.

수젯 라 플레시는 1903년 5월 26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록 짧은 삶이었지만, 그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가 전 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