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브라질 산부인과의 선구자, 마리 두로셰르(Marie Durocher)

마리 조제피나 마틸드 두로셰르(Marie Josefina Mathilde Durocher, 1808~1893)는 브라질의 부인과 의사이자 산파였습니다. 정식 자격을 갖춘 브라질 최초의 산파이자, 브라질 의학 아카데미에 입회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브라질에서의 새로운 삶

마리 두로셰르는 1808년 1월 6일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815년 나폴레옹 실각 이후 수백 명의 프랑스인이 브라질로 이주했는데, 그녀의 가족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1816년 어머니 안 두로셰르(Anne Durocher)는 딸을 데리고 먼저 벨기에를 거쳐 브라질로 떠났습니다.

동포들로부터 신용을 얻은 안 두로셰르는 프랑스 패션 의류와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여성 패션 부티크를 열었습니다. 그녀는 다섯 명의 노예를 고용해 일을 시켰고, 딸 마리는 계산대를 맡았습니다.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신 어머니이자 여성의 매력을 상품으로 삼는 패션 상인이라는 이유로 안은 좋지 않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패션의 인기는 부인할 수 없었고, 가게는 성공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새로운 소명

1829년 안 두로셰르가 세상을 떠나면서 사업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티크의 주인이 된 마리는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지만 몇 년밖에 버티지 못했습니다. 같은 해 그녀는 페드루 다비드(Pedro David) 사이에서 첫 아이를 낳았습니다. 둘째는 1831년에 태어났지만, 그해 그녀는 가게 소유권을 잃었고 남편은 살해당했습니다. 스물두 살의 마리는 두 어린 자녀를 둔 미망인이 되었고, 생계 수단마저 잃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녀는 산파 두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한동안 그녀와 함께 지냈고, 다른 한 사람은 리우데자네이루의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산파라는 직업으로 전향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동시에 마리는 브라질 국적을 취득하고 남성식 복장을 채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내 직업에 편안할 뿐만 아니라 더 단정하고 산파에게 알맞은 옷차림을 택했습니다."

산파로서의 긴 경력

1833년부터 마리 두로셰르는 의사들에게 개인 지도를 받으며 첫 분만을 시작했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 의학 아카데미가 보관한 『두로셰르 부인 분만 클리닉 기록부』에 따르면, 그녀는 그해 문제없이 환자 다섯 명을 돌보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리우데자네이루 의과외과 아카데미의 분만 과정에 등록했습니다. 이 과정은 막 설립된 것이었고, 그녀는 첫 번째 학생이었습니다. 수련 기간에도 그녀는 약 20명의 산모를 계속 돌보았습니다.

1834년 말, 마리는 최초로 산파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그녀는 이 소식을 널리 알리고 언론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모든 여성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첫해에는 50명의 여성을 도왔고, 다음 해에는 그 두 배에 달했습니다. 환자 대부분은 노예와 자유 신분의 흑인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고 모든 환자를 똑같은 헌신으로 돌보았습니다. 노예제에 반대했던 그녀는 노예 해방에 관한 글도 남겼습니다.

경력 초기에 마리는 다른 산파들과 의사들이 함께 사용하는 진료소로 이주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출산은 환자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그녀는 한 요양원의 산부인과 병동도 운영했습니다. 곧 마리의 실력, 지식, 전문성은 동료들과 환자들 사이에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긴 경력 동안 그녀는 무려 6,000명에 가까운 산모를 돌보았습니다. 같은 여성을 15번이나 도운 경우도 있었고, 한 가문의 3대에 걸쳐 손길을 빌려준 사례도 있었습니다. 의사들의 아내들은 물론, 1865년부터는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Pedro II)의 가족까지 그녀의 환자였습니다. 출산뿐 아니라 그녀는 임신 기간 내내 산모를 관리하고, 신생아 돌봄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며, 보모 선정까지 도왔습니다. 또한 때때로 경찰의 요청에 따라 강간, 영아 살해 사건이나 임신 확인서 발급과 관련해 여성들을 검진하기도 했습니다.

산과학의 개척자

브라질에서 유일한 여성 회원이자 의학 아카데미에 입회한 유일한 산파였던 마리 두로셰르는 아카데미 활동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녀는 임상 관찰 결과를 공유하고, 공중 보건 정책에 대한 비평과 제안을 내놓으며, 특정 약물의 사용에 대한 견해를 밝혔습니다. 아카데미 학술지에 글을 발표했고, 산과학 분야의 여러 저작을 남겼습니다. 이 저작들은 19세기 브라질에서 이 분야에 발표된 가장 중요한 문헌들로 평가되며, 그녀가 출산 시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과 당시의 산과 기술—산집(forceps) 사용, 신생아 소생술 등—을 완벽하게 숙달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약물이나 수술로 분만을 인위적으로 가속화하는 것에도 반대했으며, 항상 산모의 진통이 끝날 때까지 곁을 지켰습니다.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았음에도 18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마리의 환자층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산파 수가 크게 늘었고, 그녀 자신도 60세를 넘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70세가 넘어서까지 진료를 계속했습니다. 1871년, 그녀는 제국 의학 아카데미(Academia Imperial de Medicina)에 입회한 최초의 여성이 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마리 두로셰르는 1893년 12월 25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 브라질 의학계에서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