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슈만(1819~1896), 결혼 전 이름은 클라라 비크(Clara Wieck)는 독일의 음악가이자 작곡가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신동이었지만, 남편 로베르트 슈만의 성공에 가려 그 빛나는 재능이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습니다.
음악에 매료된 어린 시절
클라라 비크는 1819년 9월 13일 독일 라이프치히의 음악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마리안네 트롬리츠(Marianne Tromlitz)는 유명한 성악가였고,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는 피아노 교사였습니다. 클라라에게는 유아기에 요절한 언니 한 명과 남동생 세 명이 있었습니다.
클라라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은 별거했고, 아버지는 딸을 어머니 곁에서 데려갔습니다. 이 사건은 어린 클라라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녀는 여덟 살까지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늘 음악에 대한 열망이 자라고 있었고, 아버지 프리드리히는 클라라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클라라는 곧 일반 학교를 그만두고 하루 몇 시간씩 음악에 전념하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뛰어난 교육자였던 아버지는 다른 학생들도 가르쳤는데, 그중에는 훗날 클라라의 남편이 되는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도 있었습니다. 슈만은 몇 달간 비크 집에 머물며 공부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클라라는 여덟 살, 로베르트는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유럽을 휩쓴 신동
아홉 살이 된 클라라는 첫 콘서트를 열며 신동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라이프치히의 대형 연주장인 게반트하우스(Gewandhaus) 무대에 섰고, 처음에는 아버지가 선곡한 고전 작품과 대중적인 곡들을 연주했습니다. 동시에 자신만의 작품 쓰기를 시작해 1829년, 열 살에 『네 개의 폴로네즈(Quatre Polonaises)』를 출판했습니다.
성공에 힘입어 열한 살이 되던 1830년, 클라라는 아버지와 함께 유럽 순회 연주에 나섭니다. 이후에도 작곡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며 『피아노를 위한 왈츠 형식의 카프리스(1831~1832)』, 『피아노를 위한 변주 로망스(1833)』, 『피아노를 위한 낭만적 왈츠(1835)』 등을 발표했습니다. 평생 약 40여 곡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반대와 결혼 소송
열여섯 살 무렵, 클라라와 로베르트 슈만은 서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클라라가 열여덟 살이 되자 로베르트는 청혼했고, 그녀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수입 없는 젊은이가 딸의 연주 경력을 방해할까 우려한 아버지 프리드리히는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는 딸이 약혼자를 만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유럽 순회 연주길에 나섰지만, 두 사람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굳히고 지냈습니다.
마침내 1839년, 두 사람은 결혼 동의를 거부하는 아버지를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840년 8월 판결은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같은 해 9월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후 클라라와 로베르트 사이에는 여덟 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결혼 생활은 신동의 음악 경력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피아니스트의 남편'
결혼 초기 로베르트는 아내에게 연습 시간과 연주 활동을 줄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신의 작업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젊은 거장의 연주는 가계의 주된 수입원이었기에 클라라는 무대에 계속 섰습니다. 결혼 전보다 작곡에 쏟는 시간은 줄었지만, 그녀는 남편 작품의 첫 번째 연주자 역할을 맡아 북독일, 덴마크, 러시아 등지를 순회했습니다.
1844년, 로베르트는 아내의 순회 연주에 동행했지만 스스로를 '피아니스트의 남편'이라 불리는 것이 굴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미 건강 문제와 불안 발작을 겪고 있던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뒤 증상이 더욱 악화되었고, 깊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클라라와 로베르트는 한동안 드레스덴에서 생활하다가 직책이 기다리던 뒤셀도르프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도시는 로베르트에게 오케스트라 지휘자 자리를, 클라라에게 협연 연주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명, 언어 장애, 환각, 극심한 피로 등 로베르트의 건강 문제는 갈수록 심해졌고, 그는 지휘를 계속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비판은 날로 거세졌고, 결국 그는 자리를 조수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1854년 2월, 로베르트는 라인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했지만 구조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끝내 퇴원하지 못했습니다. 2년 후 회복의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먹는 것조차 거부했고, 1856년 7월 악액질(cachexia)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의 음악을 지키며
37세에 미망인이 된 클라라 슈만은 막내가 겨우 두 살인 일곱 자녀와 함께 남겨졌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 등 친구들이 그녀를 지지했지만, 그녀는 어떤 자선도 거절했습니다. 순회 연주를 계속하며 남편의 작품들을 연주했고, 평생 동안 그의 음악을 옹호했습니다.
말년에는 남편의 작품 전집 출간에 헌신했으며, 그녀 자신은 더 이상 작곡하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교육자이기도 했던 클라라는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쳤고, 1891년 마지막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 슈만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남편 곁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