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언론인이자 변호사였던 메리 앤 섀드 캐리(Mary Ann Shadd Cary, 1823~1893)는 노예제 폐지를 위해 평생 투쟁한 인물로, 북아메리카에서 신문을 창간한 최초의 흑인 여성입니다.
투쟁의 씨앗을 심은 어린 시절
1823년 10월 9일,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태어난 메리 앤 섀드는 구두장이 아브라함 도러스 섀드(Abraham Doras Shadd)와 해리엇 버튼 파넬(Harriet Burton Parnell) 사이에서 태어난 열세 명 자녀 중 장녀였습니다. 그녀는 자유민으로 태어났지만, 당시 미국은 노예제가 만연한 시대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미국 반노예협회(American Anti-Slavery Society)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폐지 운동가였으며, 도망 노예들이 캐나다로 피신할 수 있도록 돕던 비밀 조직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델라웨어주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교육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키자, 섀드 가족은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했고 메리는 그곳의 퀘이커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1840년, 불과 17세의 나이에 메리는 웨스트체스터에서 흑인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직접 설립했습니다. 이후에도 펜실베이니아와 뉴욕의 여러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흑인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프로빈셜 프리먼(The Provincial Freeman)> 창간
1850년, 미국 의회는 도망 노예에 대한 지원을 처벌하고 체포를 강화하는 내용의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Law)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메리는 오빠 아이작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했고, 곧 가족 전원이 뒤따라 합류했습니다. 1858년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캐나다 최초의 흑인 선출 공직자로서 의회 의원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온타리오주 윈저에서 메리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배우는 통합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이야말로 인종차별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신념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또한 반노예제 정기 간행물 프로빈셜 프리먼(The Provincial Freeman)을 창간하며, 북아메리카에서 주간 신문을 만든 최초의 흑인 여성이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신문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목소리를 실은 최초의 언론이기도 했습니다.
캐나다에서 발행되고 미국에서도 배포된 프로빈셜 프리먼은 흑인들에게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주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했습니다. 메리는 1861년까지 이 신문을 발행했으며,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흑인 미국인들의 완전한 시민권을 옹호하고 캐나다 이주를 독려했습니다. 저서 이주를 위한 호소(A Plea for Emigration) 역시 같은 취지에서 집필된 것입니다.
60세에 법학위를 쟁취하다
1856년, 메리는 캐나다 출신 이발사 토머스 F. 캐리(Thomas F. Cary)와 결혼하여 딸 사라(Sarah)와 아들 린턴(Linton)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1860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메리는 남북전쟁 발발 직전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녀는 연방군(북군)에 참여할 흑인 자원병 모집에 앞장섰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메리는 흑인 학생들을 위한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워싱턴 D.C.로 자리를 옮겨 공립학교에 채용되었습니다. 동시에 하워드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하여 1883년, 무려 60세의 나이에 법학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흑인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획득한 법학위였습니다.
늘 변함없는 열정으로 활동을 이어간 메리는 전국 여성 참정권 협회(National Woman Suffrage Association)에 가입하여 수전 B. 앤서니(Susan B. Anthony),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Elizabeth Cady Stanton)과 함께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헌신했습니다.
메리 앤 섀드 캐리는 1893년 6월 워싱턴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기려지고 있으며, 캐나다는 1994년 그녀를 국가적 역사적 인물(Person of National Historic Significance)로 지정하여 그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