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두교 여사제이자 아이티 독립의 영웅인 세실 파티만(Cécile Fatiman, 18~19세기)은 아이티 혁명의 출발점이 된 유명한 '부아카이만(Bois-Caïman) 의식'을 주재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산토도밍고의 노예 시절
세실 파티만은 아프리카 출신 노예였던 어머니와 '왕자로 추정되는 코르시카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산토도밍고에서 어머니와 함께 노예로 팔려갔다.
어머니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더 있었지만, 이들은 노예 무역 과정에서 행방불명되었고 세실은 끝내 형제들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세실은 녹색 눈동자와 길고 매끄러운 머리칼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1791년 8월 이전의 그녀 삶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부아카이만 의식
1791년 8월, 노예이자 훙간(houngan, 부두교 남성 사제)인 뒤티 부크망(Dutty Boukman)이 부아카이만에서 정치적·종교적 성격을 띤 대규모 의식을 조직했다. 맘보(mambo, 부두교 여성 사제)인 세실 파티만은 그의 곁에서 의식을 주재했다. 흰 튜닉을 입고 여신 에르줄리(Erzulie)에게 빙의된 듯 행동한 그녀는 검은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역할을 맡았으며, 참석자들은 이 동물의 피를 마심으로써 무적의 존재가 되고 동시에 서약으로 하나로 결속된다고 믿었다.
뒤티 부크망은 장프랑수아(Jean-François), 조르주 비아수(Georges Biassou), 주노(Jeannot)라는 세 노예가 산토도밍고의 노예들을 해방하기 위한 반란을 이끌 것이라고 예언했다. 세실과 부크망은 의식 참석자들에게 봉기를 촉구했고, 실제로 일주일 뒤인 1791년 8월 21일 밤부터 22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봉기가 시작되었다. 다섯 개 농장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농장을 불태우고 주인과 그 가족들을 공격했다. 약 10일간의 폭동으로 약 1,000명의 백인이 목숨을 잃고 1,800개의 농장이 파괴되었다.
아이티 최초의 집단적 노예 반란이었던 부아카이만 의식은 아이티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으며, 이 혁명은 마침내 아이티의 독립으로 이어진다.
의식 이후의 삶
1800년, 아이티 독립 직전 세실 파티만은 장루이 피에로(Jean-Louis Pierrot)와 결혼했다. 아이티 혁명 당시 전장에서 싸운 그는 잠정 왕국 시절 아이티의 왕자가 되었고, 이후에는 대통령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장루이는 1812년 공주 루이즈 주느비에브 코이다비드(Louisa Geneviève Coidavid)와 재혼하기 위해 세실과 이혼했다.
세실 파티만은 당시 식민지의 중심 도시였던 카프하이티앵(Cap-Haïtien)에서 112세의 고령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데데 바질(Dédée Bazile), 카트린 플롱(Catherine Flon), 사니테 벨레르(Sanité Belair)와 함께 아이티 독립의 4대 여성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