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권 운동가 사라 해리스 페이어웨더(Sarah Harris Fayerweather, 1812~1878)는 미국 최초의 통합 학교로 평가받는 캔터베리 여자 기숙학교(Canterbury Female Boarding School)에 입학한 최초의 흑인 학생이었다. 이 학교는 프루던스 크랜들(Prudence Crandall)이 운영했던 곳이다.
교육을 향한 갈망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계통의 자유민 농부였던 샐리 프렌티스 해리스(Sally Prentice Harris)와 윌리엄 몬테플로라 해리스(William Monteflora Harris)의 딸 사라 앤 메이저 해리스(Sarah Ann Major Harris)는 1812년 4월 16일 미국 코네티컷주 노리치에서 태어났다. 열두 형제자매 중 둘째였던 그녀는 독실한 신앙을 지닌 가정에서 자라났다.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 교육의 꿈을 안고 건너온 윌리엄은 자신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자녀들이 그 꿈을 좇도록 아낌없이 격려했다. 스무 살이 된 사라는 부모의 격려와 함께 교사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프루던스 크랜들이 전년도에 연 캔터베리 여자 기숙학교에 입학을 신청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당시 이 학교는 부유한 백인 소녀들만 받아들이는 곳이었다.
“저는 배움을 원합니다”
프루던스 크랜들은 편지에서 사라 해리스 페이어웨더가 입학을 요청하러 찾아왔던 장면을 이렇게 회고했다.
“존경받는 흑인 소녀(…)이자 훌륭한 부모의 딸이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매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크랜들 선생님, 저는 좀 더 배우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흑인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배우고 싶습니다. 제 입학을 허락해 주신다면 평생 고마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 일이 선생님께 해가 될까 염려되신다면 굳이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캔터베리 여자 기숙학교
1832년 9월, 사라 해리스 페이어웨더는 프루던스 크랜들의 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기까지 30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던 시절, 흑인 소녀의 등장에 대한 학부모들과 지역 유력 인사들의 반발은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초기의 압박으로도 사라와 프루던스의 결의를 꺾지 못하자,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학교에서 빼돌렸다.
프루던스 크랜들은 학교를 닫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포기가 아니었다. 이듬해 그녀는 흑인 소녀들만을 위한 새로운 학교를 열었다. 코네티컷은 물론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프로비던스에서 스무 명의 학생을 모집했고, 새 학교의 이름은 ‘유색 인종 소녀들을 위한 크랜들 학교(Miss Crandall’s School for Young Ladies and Little Misses of Color)’였다. 변함없이 확고했던 사라 역시 그 첫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인종차별과 폭력의 시련
프루던스 크랜들의 학교에서 학생들은 읽기와 쓰기, 역사, 지리, 수학, 프랑스어, 드로잉, 피아노 등 다양한 과목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 환경은 극도로 험난했다.
사라와 다른 학생들, 그리고 프루던스 크랜들은 곧바로 지역 사회의 적대에 부딪혔다. 경고와 협박으로도 그들을 꺾지 못하자, 배척과 폭력 행위가 본격화되었다. 학생들과 교사에게는 모든 문이 닫혔다. 상인과 의사들은 서비스를 거부했고, 음식조차 지지자들이 멀리서 대금을 내야 구할 수 있었다.
폭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웃들은 학교 우물에 독을 넣었고, 한 학생은 잠시 체포되었으며, 프루던스는 두 차례의 재판에 시달렸고, 폭도들은 쇠봉으로 학교 창문을 부수었다. 결국 1834년 9월, 학교는 불탔다. 학생들과 자신의 안전을 생각한 프루던스 크랜들은 마침내 학교를 영구히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헌신적인 부부
1833년 11월, 사라는 자신보다 열 살 위의 대장장이 조지 페이어웨더(George Fayerweather)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동시에 거행된 이중 예식이었는데, 같은 날 사라의 오빠 찰스(Charles)가 프루던스의 전 하녀 앤 마리아 데이비스(Ann Mariah Davis)와 혼인했다. 부부는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고, 첫 딸의 이름을 ‘프루던스’로 지었다.
부부는 코네티컷주 뉴런던으로 이주한 뒤 로드아일랜드주 킹스턴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예제 반대와 평등 실현에 깊이 헌신했던 사라와 남편은 킹스턴 반노예제 협회(Kingston Anti-Slavery Society)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미국 반노예제 협회(American Anti-Slavery Society) 회의에 참석하고, 프루던스 크랜들과 노예제 폐지 운동가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운동 성향의 신문을 읽었다. 조지와 사라는 자녀들의 교육에도 정성을 다했다. 딸 사라는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교사가 되었고, 아들 조지는 뉴올리언스에서 교육자로 활동했다.
사라 해리스 페이어웨더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아홉 해 뒤인 1878년 11월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