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11. 라니 카푸르데비, 차우한 왕국을 장악하다!

11. 라니 카푸르데비, 차우한 왕국을 장악하다!

소메슈와라 왕의 죽음과 아제르의 위기

서기 1178년, 차우한 왕조의 소메슈와라 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프리트비라지 라소(Prithviraj Raso)』에 따르면, 소메슈와라의 형제 칸라이(Kanrai)가 아제르의 만신전에서 일어난 오해로 인해 아닐와라의 왕 프라타프싱 솔란키를 살해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에 아닐와라의 솔란키 통치자 볼라 비마(Bhola Bhima, 재위 서기 1179~1242)는 아버지를 살해한 데 대한 복수로 아제르를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소메슈와라 왕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라스말라(Rasmala)』는 칸라이에 의한 프라타프싱의 죽음을 언급하면서도, 당시 무슬림 침략자가 아닐와라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볼라 비마가 아제르 원정 계획을 접었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프리트비라지 라소』는 프리트비라지 3세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구자라트를 침공해 볼라 비마를 죽였다고 전하지만, 『프리트비라지 비자야(Prithviraj Vijay)』에는 볼라 비마의 아제르 원정도, 프리트비라지의 보복 공격도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두 사서는 상반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열두 살 소년왕의 즉위

소메슈와라 왕의 마지막 비문은 1178년 8월 18일자로 아온발다(Aonvalda)에서 발견되었으며,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의 첫 비문은 1179년 3월 14일자로 바달리야(Badalya)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 두 날짜 사이에 소메슈와라 왕이 사망하고 프리트비라지가 즉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프리트비라지의 나이는 겨우 12~13세에 불과했습니다.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은 서기 1166년 구자라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소메슈와라가 구자라트에서 아제르의 왕이 되었을 때 프리트비라지는 겨우 3세, 동생 하리라지는 2세였으며, 두 왕자 모두 차울루키아 왕조의 궁전이 있는 아닐파탄(Anhilpatan), 즉 아닐와라에서 태어났습니다.

무예와 학문을 겸비한 왕자의 교육

아제르의 왕이 된 소메슈와라 차우한은 아들들의 교육에 훌륭한 기반을 마련했고, 덕분에 두 왕자는 무예와 경전 모두에 능통해졌습니다. 왕자들의 교육 기관은 아제르의 사라스바티 칸타바란 학당(Saraswati Kanthabharan Pathshala)으로, 프리트비라지의 숙부 비그라하라즈 4세(Vigraharaj IV)가 세운 곳으로 현재 '디와레 딘 카 조파다'라 불리는 건물입니다.

왕자들은 체단, 승마, 코끼리 조련, 사냥, 궁술 훈련을 받았으며, 『프리트비라지 라소』에 따르면 프리트비라지는 울음소리를 내는 화살까지 능숙하게 다루었다고 합니다. 역사서에는 어린 프리트비라지가 64가지 예술과 14개 비디야(Vidya)에 정통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리트비라지 비자야』에 따르면 그는 다르마샤스트라, 회화, 음악, 환술(인드라잘), 시가, 상업 예절, 산스크리트와 아파브람사, 여러 토착 언어, 새의 언어, 나아가 수학까지 배웠습니다.

왕 프리트비라지는 검, 창, 활 등 36가지 무기를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프리트비라지 비자야』에 따르면 산스크리트, 아파브람사, 프라크리트, 파이샤치, 마가디, 슈라세니 등 6개 언어에 능통했습니다.

다양한 이름과 칭호의 의미

프리트비라지 차우한은 인도 역사에서 라이 피토라(Rai Pithora)로도 알려져 있으며, 근현대 역사서에서는 프리트비라지 3세, 바라테슈와라(Bharateshwar), 사팔다라크셰슈와라(Sapadalaksheshwar)로도 불립니다. 『프리트비라지 비자야』에서는 그를 구르자라즈(Gurjararaj), 마루구르자라즈(Marugurjaraj), 즉 '구르자르 또는 마루-구르자르 지역의 주인'이라 칭했습니다.

실제로 차우한과 프라티하라가 흥하기 전, 훈족이 패배한 후 구자르(Gujjars)는 조드푸르 북부의 디드와나부터 구자라트 남부의 바론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고, 이 때문에 이 지역은 구르자르 프라데시라 불렸습니다. 프라티하라가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되자 그들은 스스로를 구르자라-프라티하라라 칭하며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굽타 왕조를 제치고 파람밧타라카 등의 칭호를 쓴 것처럼, 차우한 역시 구르자르 지역을 지배하며 구르자레슈와라라 불렀습니다. 궁정 시인 자야낙(Jayanak)은 이 칭호를 통해 차우한의 위상을 강조했으며, 고대 구르자르 지역의 남부는 오늘날까지 구자라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섭정 카푸르데비와 재상 카담바바스

프리트비라지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모후 카푸르데비(Karpoor Devi)가 아제르의 통치를 맡았습니다. 대비 카푸르데비는 체디(Chedi) 지방의 공주 출신으로 뛰어난 정치 감각을 지닌 인물로, 어린 아들의 왕국을 탁월하게 운영했습니다. 그녀는 다히마 라지푯 출신의 카담바바스(Kadambavas)를 재상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역사서에서 켐바바스, 카이마스로도 기록됩니다. 카담바바스는 주군의 영토를 지키고 왕국 방어를 위해 사방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재상 카담바바스는 학문을 사랑한 인물로, 팟마프라바와 지나파티 수리의 논쟁을 주재할 만큼 학식이 깊었습니다. 그는 왕다움 있게 국정을 보좌했으며, 특히 뱀(나가)의 진압에서 뚜렷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 시기 찬델라와 모힐 가문 역시 샤캄바리 왕국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한편 카푸르데비의 숙부 부브나야크 말라(Bhuvnayak Malla)가 프리트비라지를 돌보기 위해 구자라트에서 아제르로 왔는데, 그는 역사서에서 부바나말라 또는 부바니카말로도 불립니다. 마치 가루다가 메그나드의 뱀줄에서 라마와 락슈마나를 구해낸 것처럼, 외할아버지의 형제인 부바나말라는 프리트비라지를 적들로부터 지켜냈습니다.

카푸르데비 섭정기의 성과

카푸르데비의 보호 통치 기간은 짧았지만, 이 시기 아제르는 한층 번영하고 풍요로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프리트비라지는 어머니의 지도 아래 많은 언어와 경전을 익히며 재능을 꽃피웠고, 국정 처리에 능숙해지며 미래의 정복 계획을 확립했습니다.

『프리트비라지 비자야』(일명 『프리트비라지 마하카비암』)를 지은 궁정 시인 자야낙은, 왕의 초기 승리와 통치 체계의 공을 카푸르데비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안목으로 유능한 관료들을 곁에 두고, 어린 프리트비라지의 미래 계획이 튼튼해지도록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프리트비라지 비자야』에 따르면 재상 카담바바스의 일생은 왕과 대비에게 바쳐졌습니다. 턱이 약간 돌출된 그는 국가의 안보를 철저히 살폈으며, 어디선가 소동이 보고되면 즉시 군대를 파견해 상황을 진정시켰습니다. 카푸르데비 통치기에 나가(Naga)들이 차우한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성공적으로 진압되었습니다.

다음 화 예고

다음 편에서는 – 역사의 무대에 본격 등장하는 프리트비라지 차우한!


- 모한랄 굽타(Mohanlal Gupta)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