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지오반나 가시옹(Edith Giovanna Gassion), 예명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는 애칭 "라 모메(La Môme)"로 불리며, 1915년부터 1963년까지 활동한 프랑스 최고의 샹송 가수입니다.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 사랑의 찬가(Hymne à l'amour), 군중(La Foule), 밀로르(Milord)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에서 사랑받았습니다.
불우한 유년기, 창관에서의 성장
길거리 가수였던 어머니 아네타 마이야르(Annetta Maillard)와 서커스 예술가인 아버지 루이 알퐁스 가시옹(Louis Alphonse Gassion) 사이에서 태어난 에디트는 1915년 12월 19일 세상에 나왔습니다. 3년 뒤에는 남동생 헤르베르(Herbert)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전쟁터로 떠나고 어머니는 극심한 가난 속에 딸을 기를 수 없게 되면서, 에디트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졌지만 외할머니는 그녀를 완전히 방치했습니다. 18개월 후 휴가로 돌아온 아버지는 딸을 아버지 쪽 할머니에게 맡겼는데, 그곳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창관(매춘굴)이었습니다.
창관에서 에디트는 여인들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7~8세 무렵 심각한 병으로 일시적으로 실명하게 되었고, 할머니는 창관의 여인들과 함께 리지외(Lisieux)로 향해 성녀 테레즈의 묘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기적적으로 8일 만에 시력을 되찾은 에디트는 평생 성녀 테레즈에 대한 특별한 신앙심을 간직하게 됩니다.
'피아프 꼬마'의 탄생
1922년, 아버지 루이는 딸을 데려와 순회 예술가의 삶을 함께했습니다. 어머니처럼 에디트도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 15세의 나이에 아버지 곁을 떠나 친구 시몽 베르토(Simone Berteaut)와 듀엣으로 길거리 공연을 이어갔습니다.
2년 후 첫사랑 루이 뒤퐁(Louis Dupont)과 몽마르트르로 이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딸 마르셀(Marcelle)이 태어났지만 불행히도 2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1935년, 카바레 운영자 루이 르플레(Louis Leplée)가 그녀의 재능을 발견하고 예명 "라 모메 피아프(la Môme Piaf)"를 붙여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후 작곡가 레몽 아소(Raymond Asso)와 마르그리트 모노(Marguerite Monnot)의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음반을 녹음했습니다. 범죄 조직과 얽혀 루이 르플레가 암살된 후에는 레몽 아소가 그녀의 멘토가 되어 곡을 써주고 경력을 직접 이끌었습니다.
장미빛 인생
1937년 3월, 에디트 피아프는 파리 A.B.C. 극장에서 뮤직홀 데뷔를 하며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연극과 영화로 활동 영역을 넓혔으며, 장 콕토(Jean Cocteau)가 그녀를 위해 집필한 연극에도 출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공연을 계속하며 유대인 예술가들을 보호했고, 1944년 물랭루주 공연 중 이브 몽탕(Yves Montand)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같은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역시 1년 뒤 뒤따라갔습니다.
1945년, 에디트는 대표곡이자 초기 자작곡 중 하나인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을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 무대에 오르며 연극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1946년에는 이브 몽탕과 함께 투어를 다녔으나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고, 에디트는 북유럽과 미국 투어를 계속했습니다.
뉴욕에서 그녀는 권투 선수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1949년 10월 28일, 그녀를 만나러 가던 세르당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에디트는 깊은 슬픔과 죄책감에 빠져 대량의 모르핀에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르핀 중독과 말년
에디트 피아프는 공연을 멈추지 않았고, 샤를 아즈나부르(Charles Aznavour)가 작곡한 곡들을 열창했습니다. 1952년 9월에는 가수 자크 필(Jacques Pills)과 결혼했고, 1953년 약물 치료를 시작한 뒤 미국에서 컴백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56년 이혼했고, 1958년 조르주 무스타키(Georges Moustaki)와 함께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건강과 모르핀 중독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1959년에는 무대 위에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콘서트를 계속했지만 건강 상태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1962년, 젊은 가수 테오 사라포(Théo Sarapo)와 결혼해 듀엣 곡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1963년 10월 10일 오후 1시 10분, 에디트 피아프는 알프마리팀 지방 그라스(Grasse)에서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페르 라셰즈(Père Lachaise) 묘지에는 아버지, 두 번째 남편, 그리고 딸 마르셀과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방대한 음반 유산을 남긴 그녀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와 해외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어권 가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