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자콥(Simone Jacob), 훗날의 시몬 베일(Simone Veil, 1927~2017)은 프랑스의 정치가로, 특히 인공임신중절수술(IVG)을 비범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행
1927년 7월 13일 니스에서 태어난 시몬 자콥은 결혼을 위해 화학 공부를 포기했던 어머니 이본 슈타인메츠(Yvonne Steinmetz)와 건축가 아버지 앙드레 자콥(André Jacob) 사이의 넷째 자녀였습니다. 1940년, 시몬이 열세 살이던 해에 비시 정권이 유대인에 대한 일련의 금지령을 시행하면서 아버지 앙드레는 직업 활동의 권리를 잃었습니다. '자키에(Jacquiers)'라는 이름을 쓰던 자콥 가족은 점점 더 심한 차별에 시달렸고, 1943년 9월 독일 점령군이 해당 지역을 장악하면서 그들의 삶은 한층 위험해졌습니다.
1944년 3월 28일, 문학 교사의 도움으로 바칼로레아 시험에 응시한 시몬은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단 이틀 뒤 거리에서 무장친위대(SS) 요원 두 명에게 검문을 받아 연행되었고, 몇 시간 만에 게슈타포는 저항 운동에 참여했던 누이 드니즈를 포함한 가족 전원을 체포했습니다. 리투아니아로 강제 이송된 아버지와 오빠 장(Jean)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44년 4월 15일, 어머니 이본 자콥과 시몬, 그리고 누이 마들렌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 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한 수감자가 시몬에게 열여덟 살 이상이라고 말하라고 조언했고, 덕분에 그녀는 즉각 처형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돌 나르기와 참호 파기 등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같은 해 7월 세 여성은 보브레크(Bobrek)로 옮겨졌고, 1945년 1월에는 베르겐-벨젠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어머니 이본은 1945년 3월 15일 발진티푸스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병들어 있던 마들렌은 1945년 4월 15일 영국군의 수용소 해방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라벤스브뤼크로 끌려갔던 드니즈를 포함해, 시몬·마들렌·드니즈 세 자매만이 자콥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였습니다.
임신 중절의 합법화

프랑스로 돌아온 시몬 베일은 법학 학위와 파리 정치대학(파리 국립정치연구원) 수료 증명을 취득했습니다. 학창 시절 재무 감독관이자 기업 경영자가 된 앙투안 베일(Antoine Veil)을 만나 1946년 10월 26일 결혼했으며, 슬하에 장(Jean), 클로드니콜라(Claude-Nicolas), 피에르프랑수아(Pierre-François)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1956년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무부 교정 행정 분야의 고위 공무원이 되었고, 1970년에는 최고사법평의회 사무총장에 올랐습니다.
1974년 5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시몬은 시라크 내각의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343인 선언'이 촉발한 사회적 파장 이후, 그녀는 인공임신중절(IVG)을 비범죄화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1974년 11월에 제출된 이 법안을 둘러싼 논쟁은 극도로 격렬했습니다. 시몬 베일은 모욕과 인신공격, 심지어 협박까지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고, 법안은 1974년 11월 29일 하원을 통과한 뒤 두 주 뒤 상원에서도 가결되었습니다. 이 법은 1975년 1월 17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정치 경력
197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UDF(프랑스 민주연합)가 좋은 성적을 거두자 시몬 베일은 정부를 떠났고, 같은 해 7월 17일 유럽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82년에는 재선에 도전했다가 후보 등록을 철회했습니다. 미테랑 대통령 집권기였던 1984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는 자크 시라크와 함께 단일 야당 명단을 내세워 43.02%의 득표율을 기록했습니다. 1989년에는 RPR·UDF 연합 명단과 별개의 중도 성향 명단을 내세웠습니다.
1993년 3월, 시몬 베일은 발라뒤르 내각에서 국무부장관 겸 사회부·보건·도시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95년 자크 시라크의 대통령 당선 이후 정부를 떠났습니다. 1998년 3월에는 상원 의장의 지명으로 헌법평의회 위원에 임명되었습니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시몬 베일은 샤오아(홀로코스트) 기억 재단의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2007년에는 회고록 『한 평생(Une vie)』을 출간했습니다. 같은 해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를 지지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민·국민정체성부 신설과 같은 일부 공약에는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2008년 11월 20일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학사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2009년 1월 1일에는 하급 훈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레지옹 도뇌르 대장교(그랑 오피시에) 등급으로 승격되었습니다.
2010년 여론조사에서 시몬 베일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성으로 꼽혔습니다.
시몬 베일은 2017년 6월 30일,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