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무대 위의 전사, 헌신적인 예술가 조제핀 베이커

프레다 조제핀 맥도널드, 즉 조제핀 베이커(Josephine Baker, 1906~1975)는 가수이자 무용가, 배우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평생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고단했던 어린 시절

조제핀 베이커는 1906년 6월 3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프레다 조제핀 맥도널드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혼혈 출신으로, 어머니 캐리 맥도널드와 아버지 에디 카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한 살 무렵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고, 어머니는 아서 마틴과 재혼하여 리처드, 마거릿, 윌리 메 등 세 자녀를 더 두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을 도와야 했던 조제핀은 학교에 다니는 동시에 집안일과 잡일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1920년에는 거리 예술가 그룹 '존스 패밀리 밴드'에 합류하며 무대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시기 열세 살의 나이에 윌리 웰스와 결혼했지만 이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21년에는 윌리 베이커와 다시 결혼했으나 이 역시 짧게 끝났습니다. 이후 스탠더드 극장에서 춤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뉴욕으로 건너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했습니다. 약 2년간 뮤지컬 셔플 얼롱(Shuffle Along)의 전국 순회 공연에 참여한 뒤에도 여러 공연에서 춤을 선보였습니다.

'흑인 르뷰'로 파리를 휩쓸다

1925년, 조제핀은 미국 대사관 상업 참사관의 부인 캐럴라인 더들리 리건을 만나 프랑스 공연 '르뷰 느그르(Révue nègre)'에 출연할 것을 제안받고 파리로 향합니다. 같은 해 말부터 샹젤리제 극장(Théâtre des Champs-Élysées) 무대에 섰고, 바나나 스커트 차림으로 등장한 그녀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며 프랑스에 재즈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이 공연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흑인을 대상화한 면이 있었지만, 조제핀은 이를 발판 삼아 유럽 최고의 스타로 올라섰습니다. 예명 '베이커'는 윌리 베이커와의 짧은 결혼에서 온 것이었지만, 그녀는 평생 이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1927년 유럽 순회 공연을 마친 뒤에는 폴리 베르제르(Folies Bergère) 무대에 섰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반려 표범 '치키타'와 함께 등장해 화제를 모았는데, 치키타가 종종 객석으로 내려가 관현악단을 겁주고 관객들을 들뜨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같은 해 가수와 영화배우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1931년 히트곡 '나에게는 두 개의 사랑이 있네(J'ai deux amours)'로 큰 사랑을 받았지만, 출연 영화 주주(Zouzou)와 탐탐 공주(Princesse Tam-Tam)는 상대적으로 큰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F. 스콧 피츠저럴드, 파블로 피카소,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었습니다. 1934년에는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라 크레올(La Créole)에 출연하며 보컬 훈련에 매진해 가창력을 크게 끌어올렸습니다.

1936년 고국 미국 순회 공연에 나섰지만, 유럽에서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비평가들의 혹평마저 받았습니다. 상처받은 그녀는 이듬해 프랑스로 돌아왔고, 1937년 사업가 장 리옹과 결혼하면서 프랑스 국籍을 취득했습니다.

전쟁과 레지스탕스, 그리고 '무지개 부족'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조제핀 베이커는 프랑스군 정보부인 '두 번째 국(Deuxième Bureau)'에 정보 요원으로 발탁됩니다. 스타의 신분 덕분에 자유롭게 이동하며 의심받지 않고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던 그녀는 파리 상류 사교계의 인맥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적십자 활동에도 나섰습니다. 심지어 악보에 보이지 않는 잉크로 정보를 적어 몰래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1941년 모로코 카사블랑카로 이주했지만 중병으로 수개월간 고생했습니다. 1943년부터는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영국·미국 군인들 앞에서 노래했고, 해방 과정에서는 전선을 따라 병사들과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위한 공연을 펼쳤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의 공헌을 기려 드골 장군으로부터 무공십자훈장(Croix de Guerre)과 레지스탕스 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1947년에는 음악가 조 부이용과 재혼하고, 함께 도르도뉴 지방의 밀란데 성(Château des Milandes)을 구입했습니다. 유산으로 임신이 어려워진 그녀는 1949년부터 세계 각국의 아이들을 입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와 인종의 아이들이 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목표였습니다. 이렇게 두 딸과 열 명의 아들을 키운 그녀는 이 가족을 '무지개 부족(rainbow tribe)'이라 불렀습니다.

미국 흑인 민권 운동과 마지막 무대

1950년대 조제핀 베이커는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기고문과 연설을 통해 미국의 인종차별과 분리 정책을 비판했고, 1955년에는 흑인 소년 에멧 틸이 살해당했음에도 범인 두 명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을 유럽에 널리 알렸습니다. 1963년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대행진'에 참석해 그와 함께 연설했으며, 로사 파크스와 데이지 베이츠 등 민권 운동가들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후에도 무대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1968년 파리 올랭피아, 1973년 베오그라드와 카네기홀, 1974년 런던 팔라디움의 로열 버라이티 퍼포먼스와 파리 서커스 갈라 등에 계속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975년에는 자신의 경력을 회고하는 공연 '조제핀, 보비노에서'를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1975년 4월 10일 그녀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고, 이틀 뒤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대 위에서 빛나던 예술가이자, 전쟁의 어둠 속에서 용기를 보여준 저항가, 그리고 인종의 벽을 넘으려 평생 노력한 활동가였던 조제핀 베이커의 삶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