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바이에른의 이자보(1371~1435): 광기의 왕 옆에서 섭정이 된 프랑스 왕비

정략 결혼으로 프랑스에 온 바이에른의 이자보

바이에른의 이자보(1371~1435): 광기의 왕 옆에서 섭정이 된 프랑스 왕비
독일 제후들과의 동맹을 모색하던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필리프 2세는 조카인 프랑스 왕 샤를 6세에게 바이에른 공작의 딸 이자보를 아내로 맞이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왕비가 된 이자보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큰 정치적 무대에 서게 됩니다.

1392년, 왕의 광기와 섭정의 탄생

1392년 샤를 6세가 정신병 증세, 이른바 '광기의 발작'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해진 국왕을 대신해 이자보는 왕국의 섭정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권력 공백은 곧바로 귀족 세력들의 야욕을 자극했고, 그녀는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사이의 끊임없는 분쟁과 음모의 한복판에 내던져지고 말았습니다.

악녀라는 낙인, 카보시안 폭동

사드 후작은 저서 『바이에른의 이자보 비사(秘史)』에서 그녀를 악덕의 화신으로 묘사했는데, 이 부정적인 초상은 이후 역사가들은 물론 대중의 인식마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자보는 순식간에 민심을 잃었고, 1413년 파리에서 일어난 카보시안(Cabochiens) 폭동에서는 특별한 표적이 되어 큰 위협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부르고뉴파와의 결탁과 트루아 조약

아르마냑파에 의해 투르로 추방당한 이자보는 운명을 바꿀 선택을 합니다. 그녀를 석방해 준 부르고뉴 공작 '무용공' 장(Jean sans Peur)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1417년 말, 그녀는 트루아에서 부르고뉴파가 철저히 장악하는 정부를 수립하며 정치적 부활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절정은 1420년에 찾아왔습니다. 재앙으로 평가되는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녀의 친아들인 왕태자 샤를은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대신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것입니다. 이자보의 이러한 행보는 오늘날까지도 '왕국을 팔아넘긴 모친'이라는 논쟁적인 평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