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민권 운동가 셉티마 포인세트 클라크(Septima Poinsette Clark, 1898~1987)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맹 퇴치와 참정권 획득을 위해 워크숍과 학습 모임을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 그녀를 "민권운동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엄격한 유년기
셉티마 포인세트는 1898년 5월 3일, 인종 차별이 만연하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피터는 노예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으로, 해방 이후 배에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어머니 빅토리아는 세탁부로 일했지만, 결코 누구의 하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신과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애썼습니다.
셉티마와 그녀의 형제자매는 특히 여자아이들에게 더욱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딸들을 품위 있는 숙녀로 키우고 싶었던 빅토리아는 큰 소리로 떠들지 않기, 공공장소에서 음식 먹지 않기, 장갑 없이 외출하지 않기 등 엄격한 규칙을 강요했습니다. 셉티마는 어머니의 엄격함에 빠르게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셉티마는 1916년 중등교육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더 공부할 수 없었고, 18세의 나이로 교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찰스턴 공립학교의 교직을 얻을 수 없었던 그녀는 시 군도(Sea Islands)의 학교와 에이버리(Avery)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NAACP와의 첫 만남
낮에는 학교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같은 거리에 있는 백인 학교에 비해 형편은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학생 132명에게 교사는 단 두 명뿐이었고, 급여도 인근 백인 학교 동료들 절반에도 못 미쳤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셉티마는 남는 시간을 활용해 어른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가진 자료만으로 독창적인 교육 방법을 개발해 나갔습니다.
시 군도에서 가르치던 시절, 셉티마는 처음으로 전국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1919년, 흑인 아이들을 위한 사립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찰스턴으로 돌아온 그녀는 NAACP에 가입했습니다. 같은 해, 교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생들을 이끌고 도시 전역을 돌며 흑인 교장 임용을 요구하는 청원 서명 운동을 벌였습니다. 1만 개의 서명을 모았고, 1920년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동일 임금을 위한 투쟁
1923년, 셉티마는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전직 해군 취사병 네리 데이비드 클라크(Nerie David Clark)와 결혼했습니다. 어머니 빅토리아는 네리를 '외지인'으로 여기며 이 결혼을 몹시 반대했고, 모녀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1926년에는 첫째 아이를 잃는 비극까지 겪으며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1929년, 부부는 컬럼비아에 정착했고 셉티마는 부커 T. 워싱턴 고등학교(Booker T. Washington High School)에서 교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교육계 일원이 되었으며, 시간을 내어 대학 학업을 계속해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 시기에도 셉티마는 NAACP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5년에는 흑인 교사와 백인 교사 간의 동일 임금을 요구하는 중요한 소송에 합류했고, 이 재판은 NAACP의 큰 승리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이랜더 포크 스쿨
1947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돕기 위해 고향 찰스턴으로 돌아온 셉티마는 공립학교 교사로 일하는 한편 NAACP 부회장을 맡았고, 여성의 역량 강화와 기회 확대를 목표로 하는 다문화 단체인 기독교청년여성회(YWCA)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1956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주 공무원의 시민권 단체 가입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키면서 상황이 급변합니다. NAACP를 떠나기를 거부한 셉티마는 공립학교 교직을 잃었고,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것도 어려워졌습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걱정해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조차 보이기를 꺼렸습니다.
같은 시기, 셉티마는 테네시주의 하이랜더 포크 스쿨(Highlander Folk School)과 함께 문맹 퇴치 프로그램에 뛰어들었습니다. 특히 흑인들이 자신의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어른들을 가르쳤고, 직접 문해 교육 사업을 이끌었습니다.
시민학교(Citizenship Schools)
사촌 버니스 로빈슨(Bernice Robinson)과 함께 셉티마는 본격적인 "시민학교"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단순한 읽기와 쓰기 교육을 넘어, 운전면허 필기시험 준비, 유권자 등록 양식 작성, 수표 작성 방법까지 가르쳤습니다. 이 학교를 통해 셉티마는 흑인 공동체 안에 시민권 의식과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시민학교의 수강생들은 훗날 그곳에서 교사가 되거나 시민권 운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로자 파크스(Rosa Parks) 역시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셉티마가 경력 초창기부터 발전시켜 온 문해 교육 방법론을 바탕으로, 시민학교는 남부 여러 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이끄는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로 이관되었습니다. SCLC의 예산 지원 아래 시민학교는 1만 명의 시민을 양성했고, 이들이 다시 남부 각지에서 학교를 운영하며 하나의 거대한 평생교육 운동을 이루어냈습니다. 1969년 이전까지 약 70만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이 운동 덕분에 유권자 등록을 할 수 있었습니다.
SCLC 내에서의 활동
셉티마 포인세트 클라크는 SCLC의 교육 담당 국장이 되었고, 이 운동 안에서 지도자급 위치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녀는 SCLC 내 일부 남성 회원들의 성차별에 맞서야 했고, 성차별 문제야말로 시민권 운동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1970년, 셉티마는 SCLC 활동에서 물러났습니다. 1979년에는 지미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살아있는 유산상(Living Legacy Award)'을 받았고, 1987년에는 자서전 『Ready from Within: Septima Clark and the Civil Rights Movement』로 미국도서상(American Book Award)을 수상했습니다.
1987년 12월 15일, 셉티마 포인세트 클라크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해 교육과 시민권 운동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운동 전체의 존경을 받았으며, 마틴 루터 킹은 그녀를 "운동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