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파크스와 자주 비교되는 비올라 데스몬드(1914~1965)는 영화관에서 백인 전용석을 떠나기를 거부하며 인종 차별에 맞선 목소리를 냈습니다.
데스몬드 미용 문화 학교
비올라 아이린 데이비스(Viola Irene Davis)는 1914년 7월 6일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웬돌린 아이린 데이비스와 제임스 앨버트 데이비스 부부의 열다섯 자녀 중 한 명이었던 그녀는, 도시 흑인 공동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가정 속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비올라는 흑인의 머리카락과 피부를 위한 미용 제품이 시중에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공백을 메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핼리팩스에서는 피부색 때문에 미용사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그녀는 몬트리올과 애틀랜틱시티로 옮겨 수련을 쌓은 뒤 뉴욕의 매덤 C.J. 워커(Madam C.J. Walker) 미용학교에서까지 배움을 이어갔습니다.
교육을 마친 비올라는 고향 핼리팩스로 돌아와 자신만의 미용실 '비 스튜디오 오브 뷰티 컬처(Vi's Studio of Beauty Culture)'를 열었습니다. 이후에는 남편 잭 데스몬드(Jack Desmond)와 함께 미용실과 이발소를 겸한 가게를 운영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녀는 '데스몬드 미용 문화 학교(Desmond School of Beauty Culture)'를 설립하여, 핼리팩스와 주변 지역 흑인 여성들이 먼 길을 떠나지 않고도 제대로 된 미용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매년 열다섯 명의 여성이 이 학교에서 배웠으며, 이들은 기술 습득을 넘어 자신의 사업을 일으키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인재로 성장했습니다.
비올라는 미용실과 학교 운영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건 화장품 브랜드 '비즈 뷰티 프로덕츠(Vi's Beauty Products)'를 직접 출시하고 판매까지 맡았으며, 모든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로즐랜드 극장 사건
1946년, 비올라 데스몬드는 화장품 판매를 위해 노바스코샤주 시드니로 향하던 중 작은 마을 뉴글래스고(New Glasgow)를 지나다 차량 고장을 겪습니다. 수리에 몇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듣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녀는 로즐랜드 극장(Roseland Film Theater)에서 상영 중인 영화를 관람하기로 하고 1층 좌석 표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았을 때 극장 직원이 다가와 이 표로는 해당 구역에 앉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착오라고 생각한 비올라는 매표소로 돌아가 표를 바꾸려 했지만, 흑인에게 1층 좌석 표를 판매하는 것은 극장 방침에 어긋난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비올라는 흑인 전용으로 지정된 발코니석에 앉기를 거부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결국 극장에서 강제로 끌려 나와 폭력적으로 체포된 뒤 밤새 유치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변호인이나 법률적 조언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안내를 한 번도 받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비올라는 법정에 세워졌습니다. 발코니석과 1층석 티켓 가격의 단 1센트 차이를 근거로 사기죄가 적용된 것입니다. 전날 밤 차액을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음에도, 판사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금액인 26달러의 벌금을 선고했습니다. 재판 내내 변호인도 법률 조언도 없이, 감옥에서 보낸 밤에 충격을 받은 채 비올라는 벌금을 내고 핼리팩스로 돌아왔습니다.
재판과 항소
아내가 돌아오자 남편 잭은 이 일을 잊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침례교회 목사 윌리엄 필리 올리버(William Pearly Oliver)와 그의 아내 펄라인(Pearline)의 지지를 받은 비올라 데스몬드는 굴복하지 않고 법적 대응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언론인이자 흑인 운동가인 캐리 베스트(Carrie Best)를 통해 언론에 알려졌는데, 그녀는 노바스코샤에서 흑인 여성이 처음으로 소유하고 발행한 신문 더 클래리언(The Clarion)을 막 창간한 참이었습니다.
교회의 도움으로 비올라는 변호사 프레더릭 윌리엄 비셋(Frederick William Bissett)을 고용합니다. 그는 법원 판결에 대한 항소 대신 로즐랜드 극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길을 택했지만, 인종 차별이 아닌 사기 문제에 초점을 맞춘 탓에 소송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비셋은 변호 보수를 받기를 거부하고 그 금액을 '노바스코샤 유색인종 발전 협회(NSAACP)'에 기부했습니다. 소송 실패 이후 부부의 관계는 점차 틀어졌고, 비올라는 결국 미용실을 접고 몬트리올로 이주해 사업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뉴욕으로 옮겨 살다가 1965년 2월 7일, 위장 출혈로 5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올라 데스몬드가 남긴 유산
비올라 데스몬드의 재판은 캐나다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종 차별 사건 중 하나로, 흔히 그녀와 비교되는 로자 파크스의 체포보다 무려 9년이나 앞선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행동이 남긴 파장을 정확히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사건은 인종 차별에 맞선 저항과 연대의 불씨가 되었고, 1954년 노바스코샤에서 인종 분리 정책이 종식되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재판 15년 후 윌리엄 필리 올리버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이 일은 우리 민족에게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전에도, 그후에도 권리를 되찾기 위한 이토록 강력한 노력은 없었다. 사람들이 하나된 목소리로 일어섰다. 이러한 긍정적인 행보는 주 전역의 흑인 공동체 위상을 높였다. 나는 그 이후 일어난 긍정적인 변화의 상당 부분이 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한다."
2010년, 노바스코샤 주 부총독 메이앤 프랜시스(Mayann Francis)는 비올라 데스몬드에게 사후 특별 사면을 내렸으며, 노바스코샤 정부는 그녀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며 유죄 판결을 받아서는 안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2016년에는 캐나다 은행(Bank of Canada)이 비올라 데스몬드를 10달러 지폐에 새기겠다고 발표하며, 그녀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