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노라 페이건(Eleanora Fagan), 예명 빌리 홀리데이(1915~1959)는 세계 최고의 재즈 가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미국의 아티스트입니다.
[주의: 이 글에는 성폭력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폭력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
엘레노라 페이건은 1915년 4월 7일 필라델피아에서 십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사라 줄리아 '새디' 페이건은 겨우 13세였고, 추정 아버지 클래런스 홀리데이는 15세였습니다. 그러나 클래런스는 딸을 인정하지 않았고, 엘레노라는 어머니의 이복자매인 에바 밀러에게 맡겨졌습니다. 에바는 들락날락하며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에바의 계모 마사 밀러가 육아를 일부 도왔습니다. 이렇게 험난하게 자란 엘레노라는 아홉 살에 소년법원에 회부되었고, 열한 살에는 학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1926년에는 이웃 남성이 자신의 딸을 성폭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디가 알게 되었고, 가해자는 체포되었으며 엘레노라는 보호 조치로 가톨릭 학교에 보내졌습니다.
1928년, 새디는 13세가 된 딸을 데리고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두 사람은 매춘으로 생계를 꾸렸고, 1929년 5월 2일 체포되어 몇 달간 수감 생활을 보냈습니다. 석방된 1929년 10월, 엘레노라는 나이트클럽 오디션을 통과해 가수로 발탁됩니다. 이후 배우 빌리 도브와 추정 아버지의 이름을 따 '빌리 홀리데이'라는 예명을 쓰며 여러 클럽에서 활동했습니다. 서서히 이름을 알려가던 그녀는 프로듀서 존 해먼드를 만나 첫 음반 녹음 기회를 얻었고, Your Mother's Son-in-Law와 Riffin' the Scotch가 바로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또한 레스터 영, 듀크 엘링턴, 바비 헨더슨 등 많은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할렘의 여러 클럽에서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
성공을 거듭한 빌리 홀리데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와 다양한 연애 관계를 맺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작은 식당을 차려주고 뉴욕의 재즈 스타로 자리매김합니다. 음반 판매도 호조를 보였고, 아티 쇼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순회 공연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백인 오케스트라에 속한 흑인 가수였던 그녀는 남부 주에서 인종차별과 분리 정책의 희생자가 되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어디에도 동행할 수 없었습니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클럽에서 공연을 이어갔습니다.
1939년 3월, 교사이자 작가인 아벨 메르로폴은 자신이 쓴 시 Strange Fruit(이상한 열매)에 곡을 붙여달라고 빌리에게 요청했습니다. 이 시는 미국 남부에서 자행된 흑인 린치를 은유적으로 담고 있었습니다. 친척 중 한 명이 인종차별 범죄의 희생자였던 빌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비록 논란이 일었지만 이 곡은 큰 성공을 거두며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습니다. 커리어는 급상승했고, 저명한 음악가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며 Lover Man, Good Morning Heartache, Fine and Mellow, Billie's Blues, Don't Explain 등 수많은 곡을 녹음했습니다. 또한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재즈 거장들이 총출동한 영화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우울증과 중독
빌리 홀리데이는 지미 먼로와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에 이릅니다. 그러나 지미는 사기꾼으로, 체포되기 전까지 그녀에게 아편과 헤로인을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이혼 후 여러 만남을 거친 그녀는 결국 트럼펫 연주자 조 가이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는데, 그 역시 그녀에게 헤로인을 공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명성 높은 계약을 따내면서도 그녀는 가사를 잊어버리고 공연에 늦는 등 실수를 반복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건 전문 투어 Billie Holiday and Her Orchestra를 시작하던 무렵, 어머니의 죽음을 접하고 깊은 우울증에 빠집니다. 알코올에 의지하다 LSD까지 복용하게 되었고, 1947년 초에는 매니저가 금단 치료를 강요하려 들었습니다. 몇 주 후 그녀는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48년 3월 16일 석방된 빌리는 파산 직전이었습니다. 술을 파는 장소에서는 더 이상 노래할 수 없게 되자 콘서트홀 공연으로 무대를 옮겼지만, 수입은 예전만 못했습니다. 여전히 헤로인에 매여 있던 그녀는 갱스터 존 리비의 영향권에 들어갔고, 그는 그녀를 성폭행하며 그녀가 번 돈마저 채갔습니다. 동거인을 떠났을 때 그녀는 빚더미에 앉아 있었고, 알코올과 마약은 그녀의 무대 실력에 점점 더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광과 몰락
1950년, 빌리 홀리데이는 시카고에서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연주하며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합니다. 이듬해에는 소규모 제작사와 음반을 녹음했고, 버브(Verve) 레이블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후 찰리 셰이버스, 바니 케셀, 오스카 피터슨, 레이 브라운 등과 함께 공연하며 콘서트와 투어를 이어갔고, 무대는 유럽까지 뻗어 나갔습니다. 영광을 누렸지만 여전히 마약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1956년에는 친구이자 옛 연인인 루이스 맥케이와 함께 마약 소지로 체포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고발하지 않기 위해 결혼했지만 판결이 선고되자마자 이혼했습니다. 건강이 악화된 빌리는 다시금 재활 치료를 받습니다. 새 앨범을 녹음하고 유럽 투어에 나섰지만, 취기와 탈진 상태로 공연이 중단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갈수록 병든 몸으로 몇몇 공연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1959년 5월 30일, 집에서 쓰러진 빌리는 병원에 실려 입원했습니다. 의사들은 간경변과 신부전을 진단하고 술과 담배를 금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6월에는 다시 마약 소지로 적발되어 며칠간 병실이 경찰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지만 7월, 신장 감염과 폐울혈을 겪으며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빌리 홀리데이는 1959년 7월 17일 할렘 병원에서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어머니 곁에 안장되었으며,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해 마지막 배웅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