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디아 코마네치(1961년생)는 루마니아계 미국인 체조 선수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체조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4세에 올림픽 무대에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며 체조 사상 최초로 만점 10점을 받은 선수가 되었다.
거대한 놀이터였던 체조장
스테파니아-알렉산드리나와 게오르게 코마네치의 딸 나디아 엘레나 코마네치는 1961년 11월 12일 루마니아 카르파티아 산맥의 오네슈티에서 태어났다.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집권하기 4년 전이었으며, 그녀에게는 아드리안이라는 남동생이 있다.
나디아는 유치원 시절부터 체조를 시작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코치 부부인 벨러와 마르타 커로이가 그녀의 학교를 방문했다. 벨러는 아이들에게 "옆돌리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물었고, 나디아와 친구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이 우연한 만남이 그녀의 체조 인생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오네슈티의 체조 학교를 운영하던 벨러와 마르타는 매일 그녀를 지도했다.
진지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소녀에게 체육관과 기구들은 거대한 놀이터와 같았고 그녀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든 기술을 배우고 싶어 했던 그녀는 요구받은 것보다 더 열심히 훈련했고, 곧 남다른 재능을 드러냈다.

국내 선수권 최연소 우승자
1969년, 여덟 살의 나디아는 루마니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 참가해 13위를 기록했다. 이 결과를 끔찍한 실패로 여긴 그녀는 훈련에 더욱 매진했다. 그녀의 하루는 일주일에 6일, 체조 4시간과 학교 공부 4시간으로 나뉘었다. 그 노력의 결실로 다음 해, 그녀는 국내 선수권 대회를 제패한 최연소 체조 선수가 되었다.
1971년에는 첫 국제 대회에서 모든 타이틀을 석권했다. 이후 몇 년간 그녀의 성공은 눈부셨다. 헝가리, 폴란드,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다. 13세에 성인부로 올라선 그녀는 1975년 노르웨이에서 열린 유럽 체조 선수권 대회에서 개인 종합과 거의 모든 기구 종목을 석권했다. 초기 대회에서 이미 도마, 마루 운동, 평행봉 연기로 만점 10점을 여러 차례 받았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1975년에는 미국합통신(UPI)으로부터 '올해의 최고 선수' 타이틀을 수여받았다.
몬트리올 올림픽의 역사적 순간
14세의 나디아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첫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많은 경쟁자들보다 어렸지만, 그녀는 평행봉에서 예술품 같은 연기를 선보이며 세계를 놀라게 했고, 체조 사상 최초로 만점 10점을 받은 선수가 되었다. 이 위업은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라 당시 전광판에는 애초에 10점을 표시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대회에서 나디아는 무려 7번이나 10점을 받았으며, 개인 종합·평행봉·평균대 금메달, 단체전 은메달, 마루 운동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1976년 올림픽 체조 심판이었던 캐럴 앤 레더런은 나디아의 기술 완성도와 수행 속도가 심판들이 채점 방식을 재검토할 정도였다고 밝혔다. 같은 기준으로 채점했다면 나디아는 12/10점을 받았어야 한다는 것.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독재 치하의 국제적 스타
나디아는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고 수많은 상을 받았다. 루마니아에서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그녀에게 '사회주의 노력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독재 정권은 젊은 천재 선수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녀의 삶 자체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독재 치하 루마니아의 열악한 현실을 그대로 겪어야 했다.
1977년, 벨러가 자신도 모르게 차우셰스쿠의 아들을 불쾌하게 대한 일을 계기로, 루마니아 체조 연맹은 나디아를 코치 부부와 분리하기로 결정한다. 벨러의 헝가리계 출신 배경이 독재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루마니아인 코치를 선호했던 것이다. 나디아는 부쿠레슈티로 옮겨 훨씬 느슨한 지도 아래 훈련하게 되었다. 십 대 소녀는 외출과 영화관 관람 등 자유를 맛보았지만, 생활 방식과 훈련 환경의 변화, 그리고 부모님의 이혼까지 겹치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1978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해 과거에 비해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었고, 이후에야 다시 벨러와 마르타와 함께 훈련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 나디아는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여러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미국에서 열린 체조 시범 투어에 참가했다. 한편 루마니아에서는 독재 정권이 갈수록 억압적으로 변해갔고, 굶주림과 추위, 물자 부족이 만연했다. 정권의 위협을 느낀 벨러와 마르타는 미국 체류 중 도피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귀국 후 나디아는 정치 경찰인 세큐리타테(Securitate)의 면밀한 감시를 받았다. 차우셰스쿠의 아들 니쿠는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두 사람은 자주 함께 목격되며 온갖 소문이 파다했다. 이 관계는 젊은 여성에게 강요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녀의 루마니아 생활은 지옥이 되었다.
빛나는 경력의 마침표, 그리고 새로운 삶
1984년, 24세의 나이로 나디아는 체조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이후 루마니아 체조 연맹에서 일하며 후배 양성에 힘썼다. 같은 해 LA 올림픽을 관람하러 갔을 때 탈출을 시도했지만 끊임없는 감시에 실패했고, 이후에는 국외 출국 자체가 금지되었다. 1989년 11월, 차우셰스쿠 부부를 축출할 혁명이 일어나기 몇 주 전, 그녀는 마침내 도피하여 미국에 입국했다. 그곳에서 망명을 신청했고, 몇 년 동안 도피를 꿈꿔 왔다고 고백했다.
1994년, 나디아는 1976년 올림픽에서 만난 미국 체조 선수 바트 코너와 약혼했다. 두 사람은 2년 후 부쿠레슈티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는 그녀가 망명 후 처음으로 고향 루마니아를 밟은 순간이었다. 부부는 2006년에 아이를 낳았다. 여러 자선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그녀는 부쿠레슈티에 어린이 클리닉과 체조 센터를 설립했으며, 현재 루마니아 체조 연맹 명예 회장, 루마니아 올림픽 위원회 명예 회장, 루마니아 스포츠 대사, 국제 체조 연맹(FIG)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녀의 극적인 인생은 수많은 영화, 다큐멘터리, 저술의 소재가 되었는데, 그중에는 다큐멘터리 <'체조 선수와 독재자'(The Gymnast and the Dictator)>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