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미리암 마케바, '마마 아프리카'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불굴의 목소리

국제적으로 유명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가수 미리암 마케바(1932~2008)는 '마마 아프리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평등 운동가이자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강력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평생 인종차별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데 헌신했다.

“너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미리암 마케바,  마마 아프리카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불굴의 목소리

스와지족 상고마(전통 치유사)인 어머니 크리스티나 마케바와 코사족 교사인 아버지 캐스웰 마케바 사이에서, 젠질레 마케바 크와슈 응구바마는 1932년 3월 4일 요하네스버그 인근 프로스펙트 타운십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 '젠질레'는 '우젠질레(Uzenzile)'의 애칭으로, "너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라는 뜻이다. 젠질레가 태어나기 전, 크리스티나는 출산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특히 어렵고 위험했던 분만 과정에서 크리스티나의 어머니는 반복해서 우젠질레, 즉 "너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일화에서 아이의 이름이 유래했다.

젠질레는 당시 영국 왕령 자치령이었던 남아프리카 연합(1910년 설립)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스칸디나비아계 백인인 아프리칸족의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 이념은 특히 인종 분리를 조장했다. 흑인과 백인을 지리적·정치적으로 분리하려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씨앗이 이미 뿌려졌고, 인종 분리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음악과 함께한 어린 시절

젠질레가 생후 18일 되었을 때, 어머니는 옥수수와 맥아로 만든 전통 맥주 움콤보티(umqombothi)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렇게 갓난아기는 생애 첫 몇 달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녀가 여섯 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젠질레는 음악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여러 전통 악기를 다루었고, 아버지는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오빠는 엘라 피츠제럴드 등의 레코드를 수집하며 음악적 취향을 물려주었다. 그녀는 프레토리아의 학교에서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탁월한 재능으로 일찍이 칭찬을 받았다. 개신교 신자였던 그녀는 교회 성가대에서 영어를 못 하면서도 영어로, 그리고 코사어, 소토어, 줄루어로 노래했다.

아버지 사후 젠질레는 잠시 프레토리아에서 할머니, 사촌들과 살았고, 어머니는 요하네스버그의 백인 가정에서 일했다. 어린 그도 하녀와 보모로 일해야 했다.

짧았던 첫 결혼

1948년, 재통합 국민당과 아프리칸당(아프리칸 민족주의 세력)이 총선에서 승리하며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화하고 인종 기준으로 인구를 분리했다. 새 정부는 아프리칸족으로만 구성되었다. 6월, 총리 D.F. 말란은 "오늘 남아프리카는 다시 우리 것이 되었노라... 신이시여, 영원히 우리 것이 되게 하소서."라고 환호했다.

1949년, 열일곱 살이 된 젠질레는 경찰 견습생 제임스 쿠베이와 결혼해 딸 봉기 마케바를 낳았다. 얼마 후 유방암 진단을 받았고, 폭력적이던 남편은 2년 만에 그녀를 떠났다. 젠질레는 병을 이겨내고 어머니, 딸과 함께 살며 보모일, 택시 세차 등 여러 일을 전전했다. 10년 뒤에는 자궁경부암도 극복했다.

음악가의 길로

음악과 노래에 대한 열정으로 젠질레는 전원 남성 그룹 쿠반 브라더스(Cuban Brothers)와 함께 커리어를 시작해 미국 대중가요 커버를 불렀다. 잠시 후 1952년 재즈 그룹 맨해튼 브라더스(Manhattan Brothers)에 합류했는데, 이곳에서도 남성 멤버들 사이에서 그녀는 무대 이름 '미리암 마케바'를 얻게 되었다. 이 그룹은 남아프리카 음악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을 넘나들었다.

1956년, 미리암은 여성 그룹 스카일라크스(Skylarks)에 합류했다. 이들의 음악은 남아프리카 전통 노래와 재즈를 결합했다. 같은 해 그녀는 코사어와 영어로 첫 솔로 히트곡 "라쿠션, 일랑가(Lakutshn, Ilanga)"(영어 제목 "Lovely Lies")를 녹음했다. 이 곡은 국경을 넘어 특히 미국에서 국제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같은 해 그녀가 쓴 파타 파타(Pata Pata)는 훗날 그녀의 최대 히트곡이 되었으나, 본인은 "내 가장 하찮은 곡 중 하나"라고 평했다.

예술가로서 인정받게 되자 미리암은 자신의 명성과 청중을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에 활용했다. 1959년 라이오넬 로고신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영화 컴 백, 아프리카(Come Back, Africa)에 잠시 출연했다. 비밀리에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 극영화에서 그녀는 두 곡을 부르며 몇 분간 등장했다. 이 역할로 베니스 영화제 초청을 시작으로 런던, 뉴욕 등 세계 무대에 서게 되었고, 마일스 데이비스, 듀크 엘링턴, 니나 시몬, 마야 안젤루, 말론 브란도, 루이 암스트롱, 레이 찰스 등 당대 거장들과 교류했다. TV 쇼와 재즈 클럽 공연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녀는 뉴욕에 정착하기로 결심했으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불안정으로 다시 보모 일을 해야 했다.

길고 긴 망명 생활

1960년 샤프빌 학살(경찰 진압으로 흑인 시위대 69명 사망) 직후, 미리암은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가족 두 명도 학살로 숨졌다. 장례를 위해 남아공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여권이 취소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31년간의 망명이 시작되었다. "난 늘 떠나고 싶었지만, 돌아올 수 없게 막으리란 생각은 못 했어. 알았더라면 안 떠났을지도 몰라. 아는 곳에서 멀어진다는 건 고통이야. 망명의 고통은 망명해보기 전엔 모른다."라고 훗날 회고했다.

남아공에 남은 가족을 걱정하며 아홉 살 딸을 뉴욕으로 데려왔다. 이제 정치적 신념을 넘어, 뒤에 남은 이들을 돕겠다는 책임감을 느낀 그녀는 미국의 망명지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강력한 목소리가 되었다. 미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백인 정권과 인종 분리를 공개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정치적 예술가

미국에서 미리암 마케바는 여러 앨범을 냈으며 성공은 엇갈렸다. 타임(Time)지는 그녀를 "수년간 등장한 가장 흥미로운 신예 가수"라 평했다. 백인 관객은 그녀의 남아프리카 뿌리와 코사어·소토어·줄루어 노래를 '이국적'이라며 좋아했고, 인종 분리에 시달리던 흑인 관객은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에 공감하며 그녀를 지지했다. 미국 상황에 대해 그녀는 훗날 "미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어. 노예제를 폐지했지만, 그들 방식대로 아파르트헤이트를 겪고 있었으니까."라고 말했다.

1962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존 F. 케네디 대통령 생일 축하 공연에 섰다. 이듬해 남아공 출신 망명 음악가 휴 마세켈라와 결혼했다(1968년 이혼). 세계적 지명도를 얻은 그녀는 아프리카, 유럽, 중남미 음악을 레퍼토리에 추가했다. 1962년 케냐를 방문해 독립 자금을 모금했고, 같은 해 유엔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실상을 증언하며 남아공에 대한 경제 제재와 금수를 요구했다. 보복으로 남아공에서 그녀의 음악은 금지되고 시민권이 박탈되었다. 잠시 무국적 상태가 되었으나 알제리, 기니, 벨기에, 가나 여권을 발급받았다.

자국 정부가 미워한 그 투쟁이 세계 곳곳에서 찬사로 돌아왔다. 유엔 증언 직후,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의 초청으로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 창설 기념 공연에 초청된 유일한 예술가가 되었다.

미국 시민권 운동과 연대

미리암 마케바의 시민권, 인종 분리 반대,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은 점차 깊어졌다. 미국에서 시민권 운동에 합류했고, 흑표당(Black Panther Party) 지도자와 교제했으며,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SCLC) 후원 콘서트를 열었다. 동시에 고국을 잊지 않아 SCLC가 남아공 기업에 투자하는 것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랜 친구가 자국을 통해 내 동족의 박해를 지원하다니, 난 새로운 우상을 찾아야 해."라고 말했다.

1966년 3월, 해리 벨라폰테와 함께한 앨범 "An Evening with Harry Belafonte and Miriam Makeba"로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강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이 앨범은 아파르트헤이트 하 흑인들의 현실을 고발하고 정부 관료들을 직접 비판했으며, 스와힐리어·코사어·소토어로 구성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순회 공연도 성황을 이뤘다.

1969년, 시민권 운동가이자 전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 의장, 흑표당 지도자였던 스토클리 카마이클(훗날 콰메 투레)과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미국 내 인기가 급락했다. 미리암은 극단주의자로 낙인찍혔고, 백인 관객은 등을 돌렸으며, 공연이 취소되고 정부는 그녀를 감시했다. 바하마 방문 후 미국 입국이 금지되어 남편과 함께 기니로 이주했다.

망명지에서의 삶

기니에서 15년간 머물며 아메드 세쿠 투레 대통령 내외와 가까웠던 미리암 마케바는 미국 정부 정책을 직접 비판하고, 말콤 X와 콩고 독립 영웅 파트리스 루뭄바를 기리는 곡들을 발표했다.

아프리카 탈식민지화 시기에 그녀는 케냐, 앙골라, 잠비아, 탕가니카(현 탄자니아), 모잠비크 등 독립 기념식에 자주 초청받았다.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순회 공연을 이어갔으나 미국은 가지 못했다. 라이베리아에서는 "파타 파타"를 부를 때 관중 함성이 너무 커 공연을 중단할 정도였다. 이 무렵 '마마 아프리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6년 요하네스버그 남서부 소웨토 타운십에서 학생 시위가 경찰의 잔혹 진압으로 176~700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이어졌다. 이에 휴 마세켈라가 쓴 "소웨토 블루스(Soweto Blues)"를 미리암이 불렀다.

"아이들은 날아드는 총알에 쓰러지고
어머니들은 비명 지르며 울부짖고
아버지들은 도시에서 일하고 있었지
저녁 뉴스는 그 모든 참상을 보도했네"

— 소웨토 블루스

1985년, 가수였던 딸 봉기가 출산 중 사망했다. 두 손주를 맡게 된 미리암은 기니를 떠나 벨기에로 이주했고, 1981년 항공사 직원 바게오 바(Bageot Bah)와 결혼했다. 음악 활동(어머니를 기린 앨범 상고마(Sangoma) 등)을 이어가는 한편, 저널리스트 제임스 홀과 자서전 "Makeba: My Story"를 집필하며 아파르트헤이트와 미국을 비판했다. 1985년 프랑스 예술문화 기사 훈장을, 1990년 명예시민권을 받았다.

고국으로의 귀환

미리암 마케바,  마마 아프리카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불굴의 목소리

1990년, 남아공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상징 넬슨 만델라가 27년 수감 끝에 석방되었다. 그는 미리암 마케바에게 귀국을 권했고, 그녀는 프랑스 여권으로 31년 만인 1990년 6월 고국 땅을 밟았다.

1992년, 다르렐 루트 감독의 영화 사라피나!(Sarafina!)에 출연해 1976년 소웨토 봉기를 다룬 작품에서 주인공의 어머니 안젤리나 역을 맡았다.

1994년 만델라 대통령 취임 후에도 그녀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대통령 부인 그라샤 마첼-만델라와 함께 HIV 감염 아동, 소년병, 장애 아동의 권리를 옹호했다. 고아 소녀들을 위한 마케바 걸스 센터(Makeba Center for Girls)를 설립했는데, 이 프로젝트는 그녀에게 각별한 의미였다.

2005년 고별 투어를 시작했으나 사망 직전까지 무대에 섰다. 2008년 11월,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를 지지하는 이탈리아 콘서트에서 "파타 파타"를 부른 직후 심장마비로 쓰러져 76세로 병원에서 영면했다.

"개미를 보면 내가 보인다: 남아프리카인, 몸집보다 훨씬 큰 힘을 타고나 인종차별의 무게에 짓눌린 정신을 버텨낸다.
새를 보면 내가 보인다: 남아프리카인, 자랑스러운 민족의 날개로 아파르트헤이트의 불의를 날아넘는다."

— 미리암 마케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