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후이인(林徽因, 1904~1955)은 근대 중국 최초의 여성 건축가로 기록된다. 남편 량쓰청(梁思成)과 함께 중국 고건축 조사와 보존에 평생을 바쳤으며, 시인과 작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남겼다.
유학 시절
린후이인은 1904년 6월 10일 항저우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푸젠성 민허우현이다. 부유한 가정 환경 덕분에 국내 교육을 받은 뒤 아버지와 함께 영국과 미국으로 건너가 수학했다.
런던 세인트메리칼리지 재학 중 시인 쉬즈모(徐志摩)를 만났다. 그는 정략결혼의 굴레에, 린후이인은 어릴 적부터 약혼한 사이였던 량쓰청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정신적 동지로서 가까워졌다. 이 인연은 쉬즈모의 수많은 시에 영감을 주었으며, 린후이인 역시 산문시와 소설을 써 여러 잡지에 발표했다.
1924년, 약혼자 량쓰청과 함께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 진학했다. 두 사람 모두 건축에 열정이 있었으나, 당시 건축학과는 남성만 입학시킬 수 있었다. 린후이인은 미술학부에 입학한 뒤 예일대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건축 과목을 청강하며 독학으로 실력을 쌓았다.
건축가이자 역사가
졸업 후 귀국한 린후이인은 1928년 지린(吉林) 철도역 설계를 맡았다. 선양(瀋陽)에서는 대학 내 건축학과 설립을 돕고 잠시 강단에 섰다. 1931년 9·18 사변으로 만주가 일본에 점령당하자 베이징으로 옮겨 건축을 가르쳤다.
베이징에서 부부는 중국 고건축사 연구라는 기념비적 작업을 시작했다. 1936년 린후이인은 천단(天壇) 지붕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 되었고, 이듬해 산시(山西)성 두촌(竇村) 인근 불광사(佛光寺) 대전을 발견해 당대(唐代) 목조건축의 실체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부부는 베이징을 떠나 문화유산 복원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자녀와 함께 톈진, 쿤밍을 거쳐 쓰촨성 리좡(李莊)으로 피란했다.
1941년 남동생 린헝(林恒)이 공중전에서 전사했다. 폐결핵으로 와병 중이던 린후이인은 동생에게 바치는 시를 남겼다. "오빠, 당신의 죽음을 애도할 말이 없습니다. 이 시대가 당신에게 소박한 요청을 보냈고, 당신은 응답했습니다. 당신의 소박하고 절대적인 영웅주의는 이 시대의 시입니다. 당신이 너무 일찍 떠났음을 외치며 슬픔을 더하고 싶습니다. 오빠, 당신의 용기는 거대했습니다. 당신의 죽음은 너무 잔인합니다."
전후의 헌신
해방 후 1949년, 린후이인은 베이징 칭화대학(淸華大學) 건축학과 교수가 되었다. 부부는 고건축 연구와 보존을 이어가며 공동 저서를 펴냈고, 베이징 고건축물 보호에 힘썼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기·국장 디자인과 톈안먼 광장 인민영웅기념비 건립에도 참여해 기념비 기단의 화문(花紋) 도안을 맡았다. 베이징 도시계획 수립에도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린후이인은 1955년 폐결핵으로 5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건축사학자이자 시인, 그리고 한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낸 여성으로서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중국 근대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