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어머니의 뒤를 이은 이렌 졸리오퀴리(Irène Joliot-Curie)

이렌 졸리오퀴리(Irène Joliot-Curie, 1897~1956)는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첫째 딸로,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 그리고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으며, 인민전선 시절에는 프랑스 정부의 국무차관보를 맡아 당대 최초의 여성 정부 요인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1897년 9월 12일 파리에서 태어난 이렌은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의 첫째 딸이었으며, 1904년에는 여동생 에브(Eve)가 태어났습니다. 정규 학교에 들어간 이렌은 곧 수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이를 눈여겨본 부모는 물리학자 폴 랑주뱅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로 구성된 공동 교육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자녀들이 다양한 분야를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도록 돕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데, 덕분에 이렌은 약 2년간 질 높은 특별 교육을 받은 뒤 세비네 칼리지(Collège Sévigné)에 진학했고, 이후 소르본느 이과대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1906년, 아버지 피에르 퀴리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며 가족에게 큰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이렌의 학업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습니다. 17세의 이렌은 어머니 마리 퀴리를 따라 전선으로 향해, 전투에서 다친 병사들의 엑스선 촬영을 도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바칼로레아를 취득한 그녀는 어머니가 앙리 베크렐과 함께 설립한 라듐 연구소(Institut du Radium, 현재의 퀴리 연구소)에서 어머니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마리 퀴리의 또 다른 조수였던 프레데리크 졸리오(Frédéric Joliot)를 만났고, 두 사람은 1926년 결혼하여 1927년 딸 헬렌(Hélène), 1932년 아들 피에르(Pierre)를 두었습니다.

물리학자이자 정치가

이렌과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부부는 자연 방사능 연구와 중성자가 무거운 원소에 미치는 작용을 함께 탐구하던 중, 안정적인 원소를 방사성 원소로 변환하는 '인공 방사능'을 발견하는 위업을 이루어냈습니다. 1934년 어머니 마리 퀴리가 과도한 방사능 노출로 인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인 1935년 이렌과 프레데리크는 인공 방사능 발견의 공로로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936년 인민전선이 총선에서 승리하자, 총리 레옹 블룸은 당시 선거권조차 없던 여성 세 명을 국무비서관으로 정부에 기용했습니다. 이렌 졸리오퀴리는 과학 연구 담당 국무차관보에 임명되어 수잔 라코르(Suzanne Lacore), 세실 브룅스비그(Cécile Brunschvicg)와 함께 프랑스 정부에 입각한 최초의 여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몸이 약해진 그녀는 이 직책을 겨우 석 달 만에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1937년 이렌은 파리 이과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이후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1939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 서임되었으며, 1946년에는 라듐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고 프랑스 원자력청(CEA) 창설에도 참여해 6년간 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렌 졸리오퀴리는 1956년 3월 17일 파리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 마리 퀴리와 마찬가지로, 그 병의 원인은 과도한 방사능 노출이었습니다. 모녀가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운명을 공유한 것은, 과학에 대한 헌신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요구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