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볼레스와프 3세 크시부우스티(1086~1138): 폴란드 통일을 이룬 피아스트 왕조의 공작

볼레스와프 3세 크시부우스티(1086~1138): 폴란드 통일을 이룬 피아스트 왕조의 공작

얀 마테이코(Jan Matejko)가 그린 볼레스와프 크시부우스티의 초상

피아스트 왕조의 후계자

볼레스와프 크시부우스티(1086~1138)는 폴란드 피아스트(Piast) 왕조 출신의 공작으로, 브와디스와프 헤르만(Władysław Herman)의 아들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대신해 국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던 궁정백 시에치에흐(Sieciech)에 맞서 싸웠다. 이 투쟁의 결과로 1102년 소폴란드(마워폴스카)와 실레시아로 구성된 자신만의 영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같은 해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이 사망하자, 볼레스와프는 폴란드 영토의 일부에서 독립적인 군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형제 간의 권력 다툼과 황제의 침공 격퇴

그러나 곧바로 이복형 즈비그니에프(Zbigniew)와 갈등에 휘말렸다. 1109년에는 형을 지원하려고 폴란드로 쳐들어온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5세의 원정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군사적 재능을 입증했다. 이후 볼레스와프는 정적이 된 형을 체포하고 눈을 멀게 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해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포메라니아 정복과 결혼 동맹

볼레스와프는 포메라니아인들과 오랜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단치히(그단스크)와 서포메라니아 전역에 대한 주권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두 차례 결혼했는데, 첫 번째 아내는 키예프 공작가문의 즈비스와바(Zbysława)였고, 두 번째 아내는 베르크 백작의 딸 살로메아(Salomea)였다.

상속법 선포와 역사적 평가

그에게는 적어도 열네 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중 다섯 아들은 성년까지 생존했다. 임종을 앞두고 그는 이른바 '크시부우스티 법령'으로 불리는 상속 규정을 선포하여 사후 영토 분배 방식을 정했다. 이 때문에 그는 나라의 분열 시대를 초래한 군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이는 그의 의도와 달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는 갈루스 아노니무스(Gallus Anonymus)가 폴란드 최초의 연대기를 편찬했는데, 이 기록은 상당 부분 볼레스와프 공작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