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드비가 칼리스카의 초상화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위 그림은 화가 얀 마테이코가 묘사한 13세기와 14세기가 교차하는 시기의 궁정 의상으로, 당시 폴란드 왕비 역시 이와 비슷한 차림새였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야드비가 칼리스카(Jadwiga Kaliska, ?~1339)는 피아스트 왕조 출신의 공작부인이자 폴란드 왕비로, 1270년경 태어났다. 그녀는 '경건공'이라 불리던 분국 공작 보레스와프의 딸이었으며, '칼리시의 야드비가'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친족들의 결정에 따라, 쿠야비 일부를 다스리던 과감하고 모험심 넘치는 군주 브와디스와프 우키테크와 결혼했다.
혼란기를 견뎌낸 왕비의 길
남편 브와디스와프 우키테크는 폴란드 왕위를 놓고 체코의 바츠와프 2세와 경쟁하다 패배했고, 야드비가는 신분을 숨긴 채 쿠야비의 작은 마을에서 여러 해 동안 은거하며 지내야 했다. 남편이 귀환한 뒤에는 1311년부터 1312년까지 벌어진, '알베르트 시장의 난'으로 기억되는 크라쿠프 시민 계층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1320년, 그녀는 드디어 폴란드 왕비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정치 무대에서 행사한 영향력
야드비가 칼리스카는 정치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남편 브와디스와프 우키테크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남편은 자신의 인장마저 아내에게 맡겼는데, 덕분에 야드비가는 핵심 사안들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특별한 특전으로 확인되는 교황청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으며,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크라쿠프 궁정 내 헝가리 파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며느리와의 대립
아들 카지미에시 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리투아니아 출신 며느리 알도나 안나 게디미나우나의 대관식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녀의 논리는 단순했다. 나라에 왕비는 자기 자신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말년의 삶
과부 영지로 하사받은 노비손치 일대의 땅을 유능하게 관리해낸 그녀는, 훗날 그곳의 가난한 클라라 수녀원에 들어가 종교 생활에 전념했다. 생애의 마지막 무렵에는 헝가리로 떠나 딸 엘주비에타 우키테크나와 그 배우자인 헝가리의 통치자를 만날 계획을 세웠으나, 이 소망이 실현되기 전에 1339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