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블루아의 샤를(1319~1364): 브르타뉴 계승 전쟁의 중심 인물

블루아의 샤를, 브르타뉴 공작이 되다

블루아의 샤를(Charles de Blois, 1319~1364)은 1337년 파리에서 브르타뉴 공작 장 3세(Jean III)의 조카인 잔 드 퐁티에브르(Jeanne de Penthièvre)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절뚝발이(La Boiteuse)'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 결혼을 통해 샤를은 브르타뉴 공작위에 대한 상속권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1341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Philippe VI)가 콩플랑 판결(Conflans)을 통해 샤를 드 블루아를 정당한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하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이 결정에 반대한 몽포르 가문과의 갈등은 곧 '브르타뉴 계승 전쟁(War of Breton Succession)'이라 불리는 장기 전쟁으로 번졌고, 이 전쟁은 백년전쟁의 한 전선이기도 했습니다.

포로 생활과 귀환

1344년 샤를은 캉페르(Quimper)를 점령하는 등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1347년 반네(Vannes) 공방전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후 무려 9년간 잉글랜드에서 억류되어 지냈습니다.

석방을 위해 샤를은 70만 골드 플로린(gold florins)에 달하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는데, 이 금액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완전히 지불되지 못했습니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기사 서임

1357년, 렌(Rennes) 방어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젊은 용사 베르트랑 뒤 게클랭(Bertrand du Guesclin)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습니다. 뒤 게클랭은 훗날 프랑스 최고의 명장으로 성장하는 인물로, 이 서임은 샤를의 통치 시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로 남아 있습니다.

오레 전투에서 최후를 맞다

그러나 샤를의 운명은 1364년 9월 29일 오레 전투(Battle of Auray)에서 기울었습니다. 그는 장 드 몽포르(Jean de Montfort)의 아들, 즉 훗날 브르타뉴 공작 장 4세(Jean IV)가 되는 경쟁자와의 결전 끝에 전사했습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브르타뉴 계승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고, 몽포르 가문이 브르타뉴 공작위를 확정짓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