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세 입대, 평생을 전장에 바친 군인
프랑수아 에티엔 크리스토프 드 켈러만(François Étienne Christophe de Kellermann, 1735~1820)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입대하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스트라스부르 출신인 그는 오랜 세월 군대에서 경력을 쌓았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많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나라를 떠나던 와중에 오히려 자진하여 혁명에 가담하는 선택을 했다.
발미 전투의 승자
1792년, 켈러만은 발미 전투의 승리를 이끈 인물 중 한 명인 샤를 뒤무리에(Charles Dumouriez) 휘하에서 복무했다. 같은 해 9월 20일 벌어진 이 전투에서 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에 맞서 굳건히 버텼고, 감행한 포격과 기병 돌격으로 적의 진격을 좌절시키며 두각을 나타냈다. 유럽 군주국 연합군의 침공을 저지한 이 승리는 신생 프랑스 공화국의 운명을 가른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훗날 그가 '발미 공작' 칭호를 받는 토대가 되었다.
공포정치의 희생자, 그리고 복권
그러나 혁명의 격랑 앞에서 그조차 안전할 수는 없었다. 1793년 공포정치기에 체포되어 투옥된 켈러만은 로베스피에르 실각 이후에야 위기를 넘겼고, 이후 복권되어 알프스 방면군과 이탈리아 방면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젊은 장군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노장 켈러만은 곧 지휘관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제국 원수, 그리고 왕정복고
1804년 나폴레옹은 그를 제국 원수로 임명하고 후방의 여러 지휘 직책을 맡겼다. 이미 고령에 이른 켈러만에게 주어진 임무는 최전선의 화려한 무공보다는 후방 병참과 행정이었지만, 그는 이를 성실히 수행하며 제국을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자, 루이 18세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프랑스 귀족원 의원 자격을 수여했다. 켈러만은 1820년 파리에서 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프랑수아 에티엔 켈러만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병장군으로 활약하며 집안의 군사적 명성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