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드 드 샤티용(Eudes de Châtillon)은 1088년, '우르바노 2세(Urban II)'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었다. 그는 십자군 전쟁을 선포한 교황으로서 중세 유럽의 역사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긴 인물이다.
초기 생애와 성직자의 길
1042년경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샤티용쉬르마른에서 태어난 오드는 옥세르(Auxerre)의 부제장(archdeacon)으로 성직 생활을 시작했다. 1070년에는 당시 유럽 교회 개혁의 중심지였던 클뤼니(Cluny)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고, 이곳에서 그레고리안 개혁의 정신을 깊이 체득했다.
1078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 의해 오스티아(Ostia)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종교회의를 주재하며 교회 내부의 질서 확립에 힘썼다.
교황 즉위와 제국파 분열의 극복
1088년 교황으로 선출된 우르바노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지원하는 대립교황 세력, 이른바 '제국파'가 일으킨 교회 분열(분열주의)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외교력과 인내심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 로마로 복귀하는 데 성공하며 교황권의 권위를 회복했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전임자 그레고리우스 7세가 추진한 교회 개혁 사업을 계승했다. 성직자의 서품 매매 금지, 사제 독신제 강화, 황제의 주교 서품 간섭 배격 등 그레고리안 개혁의 노선을 충실히 이어갔다.
클레르몽 공의회와 십자군 설교
1095년, 우르바노 2세는 프랑스 클레르몽(Clairmont)에서 열린 공의회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비잔틴 제국의 구원 요청을 계기로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Croisade)을 호소하는 역사적인 설교를 했다.
그에게 십자군은 단순한 군사 원정이 아니라, 동방의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의 관계를 회복하고 서방 기독교 세계를 교황의 권위 아래 하나로 통합하는 수단이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Dieu le veut)!"라는 구호는 청중을 격분시켰고, 이는 제1차 십자군 출정의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 국왕과의 갈등
우르바노 2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Philippe Ier)가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Bertrade de Montfort)와의 재혼을 강행하자 이를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무효 혼인으로 규정하고 왕을 파문(excommunication)했다. 이는 교황권이 세속 군주보다 우월함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예루살렘 함락을 보지 못한 최후
1099년 7월 15일, 제1차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그러나 우르바노 2세는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기 두 주일 전인 같은 해 7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평생 소망하던 성지 탈환의 소식을 생전에 듣지 못한 것이다.
그는 1881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교회 개혁과 십자군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