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호세 베르나르도 알세도 – 페루 국가를 작곡한 음악가의 생애

페루 국가의 탄생, 호세 베르나르도 알세도

호세 베르나르도 알세도(José Bernardo Alcedo)는 1798년 페루 리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의사 호세 이시도로 알세도(José Isidoro Alcedo)였고, 어머니는 로사 렐우에르토(Rosa Reluerto)였습니다.

1807년 그는 산토 도밍고 수도원의 재속 수사, 즉 돈라도(donado) 서품을 받았습니다. 이 무렵 음악에 대한 소명을 깨달았고, 산토 도밍고 수도원과 산 아구스틴 수도원의 성가대장이었던 파스쿠알 니에베스 신부와 치프리아노 아길라르 신부에게 각각 음악을 사사받았습니다. 그는 어린이 성가대 지도를 맡았으며, 18세에 D장조 미사곡을 작곡하며 첫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페루 국가 공모전과 당선

1821년 8월 7일, 독립 선포 며칠 뒤 호세 데 산 마르틴은 국가 행진곡, 즉 국가(國歌) 작곡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알세도는 이미 풍자적이고 반항적인 대중가요 라 치차(La chicha)를 함께 만든 바 있는 호세 데 라 토레 우가르테(1786~1831)와 손잡고 참가했습니다.

1821년 9월 17일, 일곱 개의 최종 후보작 가운데 알세도의 곡이 당선되었고, 이 곡은 오랫동안 '국가 노래'로 불렸다고 루이스 알베르토 산체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알세도의 스승이었던 치프리아노 아길라르 역시 이 공모전에 참가했습니다. 국가는 비공식적으로 9월 21일 프린시팔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이는 칼라오의 라 마르 함대 항복 발표 직전이었습니다.

공식 초연

국가는 9월 23일 로사 메리노(Rosa Merino)의 창으로 공식 초연되었으며, 오케스트라는 알세도 본인이 지휘했다고 카를로스 라이다가 전합니다.

칠레에서의 삶과 귀국

1822년 8월 15일, 알세도는 애국군에 소위 계급으로 입대하여 칠레 제4대대의 수석 음악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823년에는 칠레로 건너갔고, 이후 제대를 신청했습니다. 그는 개인 음악 교습에 전념했으며, 이후 산티아고 대성당 성가대에 합류하여 1847년 성가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1829년과 1841년 두 차례 페루로 돌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리마 언론에 광고를 내고 음악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857년 산티아고 출신 여성 후아나 로하스 세아(Juana Rojas Cea)와 결혼했고, 1864년 페루 정부의 초청으로 영구 귀국했습니다. 그는 명예 연금을 받았고 육군 군악대 지휘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국가 판본을 둘러싼 논쟁

리마에 정착한 후 알세도는 자신이 작곡한 국가가 음악과 가사 모두 여러 차례 수정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는 이탈리아 출신 거장 클라우디오 레바글리아티(1843~1909)가 손질한 일부 편곡은 받아들였습니다.

애국가 판본을 둘러싼 복잡한 역사는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1901년에는 호세 데 라 토레 우가르테의 가사를 대체하기 위한 공식 공모전까지 열려 시인 호세 산토스 초카노가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13년 2월 26일 법률 제1801호에 따라 이 결과는 무효화되었고, 알세도와 데 라 토레 우가르테가 만든 원래 버전에 레바글리아티의 편곡을 포함한 것이 불가침의 것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말년과 죽음

1867년 알세도는 필하모닉 협회의 초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에는 같은 기구의 종신 명예 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869년에는 저서 『음악 기초 철학』을 출판했으며, 2년 뒤 라 메르세드 교회에서 미제레레(Miserere)를 연주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1878년 12월 18일 리마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프로세레스 묘지(Panteón de los Próceres)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작품 중에는 행진곡과 군가('전사의 찬가', '엘 도스 데 마요', '라 아라우카나')뿐 아니라 종교 음악('성지 주일을 위한 수난곡',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에 바치는 엄숙한 트리사지오')과 민요('라 코라', '라 폴라')도 포함됩니다.

출생 연도를 둘러싼 논란

알세도의 출생 연일은 물론 생애의 많은 세부 사항들은 끊임없는 논쟁과 상충하는 기록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1945년 연구자 카를로스 라이다가 알세도의 사망 증명서를 발견했는데, 그 문면으로 미루어 그가 1788년생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다만 해당 증명서에 기록된 정보의 출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