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제국의 운명이 걸린 격동의 시대, 만코 잉카(Manco Inca)는 우아이나 카파크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스페인 정복자들에 맞서 마지막 저항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의 삶은 배신과 환멸, 그리고 불굴의 항전으로 이어지며 잉카 제국 멸망사의 핵심을 이룹니다.
스페인의 괴뢰 황제로 즉위하다
만코 잉카는 아타우알파 휘하 장군들이 쿠스코 귀족들을 상대로 벌인 가혹한 숙청을 피해 빌카밤바의 정글 속에 숨어 살아남았습니다.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가 모두 죽고 제국의 정통 계승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는 쿠스코 귀족들과 함께 하키하우아나의 스페인 진영에 모습을 드러냈고,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그를 성대한 예우로 맞이했습니다.
정통 쿠스코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려던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장군 칼쿠키마를 만코 잉카의 손에 넘겨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키토 점령군으로부터 쿠스코를 탈환한 뒤 피사로는 만코 잉카를 황제로 즉위시켰고, 이후 제국의 수도를 되찾으려던 키스키스의 군대와 싸우는 것도 도왔습니다. 원정은 키토군이 철수한 하우하 북방까지 이어졌으며, 만코 잉카는 에르난도 데 소토와 함께 싸워 적을 완전히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환멸: 배신당한 황제
그러나 쿠스코로 돌아온 만코 잉카를 기다린 것은 완전히 변해버린 스페인인들의 태도였습니다. 우호적인 대우는 강간, 약탈, 강도 행위, 고문, 굴욕으로 바뀌었고, 만코 잉카 본인조차 세 차례나 사슬에 묶여 금으로 몸값을 치러야 했으며, 여동생을 곤살로 피사로에게 넘겨주는 굴욕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스페인인들에게 완전히 환멸을 느낀 그는 은밀히 거사를 준비했고, 마침내 쿠스코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4만 명의 대군을 규합하여 1536년 4월 말 쿠스코를 포위했습니다. 스페인 기병대는 방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밤낮없이 이어지는 잉카군의 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포위망은 갈수록 좁혀져 스페인인들이 장악한 영역은 중앙광장과 그 주변뿐이 되었습니다. 한편 만코 잉카는 티투 유안키에게 군대를 맡겨 리마 공격에도 나섰습니다.
사크사이우아만과 올란타이탐보의 전투
쿠스코에서 7일간 움직이지 못한 스페인군은 마침내 에르난도 피사로의 결단으로 공세에 나섰습니다. 목표는 성채 사크사이우아만. 두 차례의 공격 끝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스페인군은 요새의 잉카 대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만코 잉카는 처음 칼카로 물러났다가, 군대를 재정비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올란타이탐보로 이동했습니다. 쿠스코의 포위가 깨졌어도 양측의 충돌은 매일 계속되었고, 에르난도 피사로는 반란의 불씨를 완전히 끄려면 지도자를 직접 생포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기병 60명과 보병 30명, 그리고 수천 명의 원주민 보조병으로 구성된 새로운 원정대를 조직했습니다.
올란타이탐보 인근에서 피사로는 양면 공격을 위해 군대를 둘로 나눴지만, 만코 잉카는 기민한 기동으로 두 부대를 모두 고립시켜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전투는 학살에 가까웠고, 스페인군에 붙은 원주민 보조병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패배 이후 에르난도 피사로는 쿠스코 시내는 물론 식량을 구하러 나선 주변 지역에서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칸치스, 하키하우아나, 친체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연이어 패배했습니다. 놀랍게도 만코 잉카는 스페인인 포로들에게 서양 무기 사용법을 배웠고, 이후 전투에서는 직접 말에 올라타 지휘하는 모습으로 목격되기도 했습니다.
빌카밤바의 산중 왕국과 비극적 최후
1537년 3월, 칠레 원정에 실패한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귀환하여 반란 잉카와의 화친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알마그로의 진짜 목표는 만코 잉카의 지원을 얻어 쿠스코에서 피사로 형제를 축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올란타이탐보에 머물던 만코 잉카는 리마 포위전의 실패 소식과 자신의 지휘관들이 중부 고원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는 빌카밤바로 철수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고, 그곳을 거점으로 게릴라전을 개시하여 쿠스코와 리마 사이를 오가던 상단(商團)을 연달아 파괴했습니다.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스페인인들은 산 후안 데 라 프론테라 데 우아망가(현 아얌차요) 시를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만코 잉카는 한층 유연한 정책을 구사했고, 피사로 일파의 탄압을 피해 달아나던 알마그로파 스페인인들에게까지 피난처를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544년, 그는 자신이 관대하게 보호해 주었던 바로 그 알마그로파에 의해 빌카밤바의 은신처에서 암살당하고 맙니다.
만코 잉카의 저항은 사이리 투팍, 투팍 아마루 1세 등 아들들에게 계승되어 빌카밤바의 잔존 국가는 1572년까지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비록 제국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그의 반란은 잉카 민족이 외세에 굴복하지 않았음을 보여준 영원한 상징으로 남았습니다.